영화 <러빙>과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_실화와 영화_03
제프 니콜스 감독의 영화 <러빙 Loving>은 영화 제목하고 이름이 똑같은 러빙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조엘 에저튼(리처드 러빙)과 루스 네가(밀드레드 러빙)가 연기한 러빙 부부의 사랑이, 지구라는 이 작은 별 위에 사는 인류에 의해 무수히 반복되어 온 그 어떤 사랑보다 특별히 더 아름답고 눈부신 데에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남편 리처드 러빙은 백인이었고 아내 밀드레드는 혼혈이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1958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이 불법이었다. 그러니까 인종적 순수성을 위해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결혼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강요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동성혼을 금지하고 이성끼리의 혼인만 인정하는 것을 보면 이런 타 인종 간 결혼 금지가 있었다는 것도 뭐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편견은 사실 뭔가 대단한 근거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런 기반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러빙>은 서로를 바라보는 러빙 부부의 눈길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그윽한 깊이가 느껴지는 사랑을 과장 없이 그리면서 이 평범한 ‘사랑’이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어,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을 바꾸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다.
그들은 왜 고향에서 추방당해야 했나
갑작스러운 밀드레드의 임신으로 러빙 부부는 타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고향을 떠나 워싱턴 D.C. 까지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결혼 사실이 발각돼 한 밤 중에 체포된 러빙 부부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무려 25년 간 고향 버지니아에서 추방된다. 이에 인권 투쟁과 사회참여 활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러빙 부부는 단지 부부로서 함께 살고 싶어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소송을 제기한다. 마침내 기나긴 법적 투쟁 끝에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고 마침내 연방대법원 얼 워렌 수석 재판관은 1967년 6월 12일 버지니아주의 인종간 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고 선언한다.
"개인은 인종 차이를 떠나 자유롭게 혼인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또한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우리의 헌법 하에, 다른 인종인 사람과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는 개인에게 있으며 주가 제한할 수 없다.”
- 1967년, 미 연방대법원, 얼 워렌 수석재판관
이것이 바로 미국 흑인 민권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러빙 대 버지니아주(Loving v. Virginia)' 판결이다. 이 판결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인종에 따른 차별은 위헌의 의심이 가는 차별(supect classification)으로 엄격 심사가 적용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역사적 판결 이후 버지니아 주를 비롯해 미국 16개 연방주에서도 다른 두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파기되었고, 타인종간 결혼금지법은 폐지된다. 그날을 기념해 인종차별과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믿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연방 대법원의 러빙 판결이 내려진 6월 12일을 '러빙 데이(Loving Day)'로 기억하고 있다.
차별의 역사는 끈질기다
1862년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하고, 1865년 발발한 남북전쟁이 노예제 폐지에 찬성하는 북부 연맹군의 승리로 끝난 뒤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흑백 인종차별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단지 공식적으로 즉, 법적으로만 그랬다. 1977년 남부에 주둔하던 북부 연방군이 철수하자 법적으로 보장된 흑인의 투표권도 박탈되었고, 흑인들을 범죄자로 몰아 시민권을 박탈하고 노예처럼 사용하는 일이 반복된다. 남북전쟁과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미국에서 유색인종, 특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역사는 오래 지속되었고 흑인들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흑인 노예는 계속 존재했고,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이 절정에 달할 때까지 미국에서 흑인들은 지나가는 백인들에 의해 이유 없이 구타당한 뒤 목매달리기도 했고,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탈수도, 같은 식당을 이용할 수도, 같은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 백인들은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하는 흑인 학생들에게 화염병을 던졌고, 심지어 백인이 사용하는 수영장에 흑인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맨슨 호텔의 사장은 흑인들이 들어가 있는 수영장에 염산을 풀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오랫동안 미국 법원은 인종차별을 실질적으로 묵인하는 <짐 크로우 법>이라는 인종차별법에 따라 합법을 가장한 차별정책과 흑백 분리정책(Segregation)을 인정해왔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원칙 Separated but equal, 즉 '분리하지만 동등한 대우를 하면 차별이 아니다'라는 정책이었다.
분리하면서 차별이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수많은 인권운동 활동가들과 수많은 흑인들의 저항과 희생으로 마침내 분리정책은 서서히 무너지고 마침내 1954년 연방 대법원은 <브라운 VS.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에서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을 위헌으로 선언하고 모든 공립학교에서의 흑백 분리 교육을 시정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이후로도 남부에서는 오랫동안 분리정책이 지속되었다. 이후 1955년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버스에서 체포당한 사건을 계기로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 등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벌어졌고, 흑백 분리정책 폐지를 위한 민권운동의 횃불이 타올랐다.
대법원의 판례 변경에도 남부 대다수 주들에서 흑백분리정책과 인종차별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흑인 민권운동 단체 <전미 유색인 연합(NAACP)>는 백인들만 다닐 수 있었던 아칸소주의 리틀록 하이 스쿨에 흑인 학생 9명을 입학시켜 흑백 분리정책의 편견과 벽을 깨부순다. 이것이 바로 1957년 리틀록 하이스쿨 9인의 투쟁이다. 마침내, 1965년 킹 목사가 이끈 시위 행렬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에 끝까지 저항해 싸웠던 남부의 도시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 시에서 흑인 투표권을 요구하며 몽고메리 시까지 행진했다. 인종주의자들의 온갖 방해와 테러, 백인우월주의적인 공권력의 위협과 폭력진압에도 불구하고 3차례에 걸쳐 진행된 셀마 행진은 성공을 거두었고, 킹 목사가 이끈 시위대가 몽고메리 시에 도착했을 때 행렬의 규모는 2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 셀마 행진으로 연방투표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안은 흑인 유권자에게 투표에 필요한 요건이나 절차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여 흑인 유권자가 미국 시민으로서 선거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부정당하거나 제한받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짐승 같은 압제의 발길에 걷어차이고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가 왔다."
- 마틴 루터 킹.
1967년 <러빙 판결>도 바로 이런 지난한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영화 <러빙>은 바로 이 미국 사법 역사상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의 당사자인 러빙 부부의 사연을 담고 있지만 화려한 변론이나 영웅적 투쟁의 모습을 부각하지 않는다. 극적인 반전과 격정적인 투쟁 장면, 반전과 승리도 없이 단지 러빙 부부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린다. 심지어 러빙 부부가 대법원 재판에 출석해 법정공방을 벌이는 장면도 없고, 소송에서 이겼다는 통지도 전화를 통해 전달받을 뿐이다.
그레이 빌렛의 사진집, 러빙 부부의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을 담다
이런 절제의 미덕과 과장되지 않은 감정 연기가 오히려 진한 감동과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 1965년 <라이프>지의 보도 사진작가 그레이 빌렛이 직접 러빙 부부를 찾아와 함께 지내며 러빙 부부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그레이 빌렛의 포토 에세이는 <러빙 부부: 친밀한 초상 The Lovings: An Intimate Portarait>라는 제목의 사진집으로 출간되었고 역사의 주인공이 된 러빙 부부의 살아있는 숨결이 느껴지는 사랑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 아내의 무릎을 베든 남편의 편안한 모습, 꾸밈없는 웃음, 때론 불안을 억누르는 듯한 불편한 표정, 단호하면서도 결의에 찬 순간들을 담은 흑백사진은 이들 부부의 사랑을 인위적으로 갈라놓고 부정하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당하며 불합리한 일인지를 웅변해준다.
영화 <러빙>은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상식과 진리가 한때는 견고한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부정되어 왔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한때 보편적인 진리라 믿어지던 가치와 도덕이 어쩌면 100년도 가지 못할 허위나 가식의 체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화 <러빙>은 인종과 차별을 뛰어넘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의 위대함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함께 보아도 좋을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