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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4. 2020

영화 <1987>과 6월 민주항쟁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는 제목 그대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이한열의 죽음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약속을 받아낸  6월 민주항쟁까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인 1987년의 역사를 시각화했다. 87년의 역사를 실제로 겪었던 이들은 모두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식으로든 요동치는 감정의 파고를 경험하게 될 것 같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그 권력을 공고화했던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이들이라면 87년 6월 항쟁의 이 영화적 재현에 뜨거운 감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으로 깔리던 '이한열 합창단의 노래 '그날이 오면'에 결국 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트린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작사, 작곡 문승현



모두의 선한 선택이 모여



모두가 뜨거웠고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해

영화 포스터에 적힌 카피처럼 87년 그해, 우리 모두가 뜨거웠고,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신군부에 의해 중단된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리려 적극적으로 투쟁의 현장에 나섰던 재야인사나 학생운동권도 있었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군부독재의 인권유린에 맞선 법조인, 언론인, 성직자, 직장인들도 있었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에게 물과 손수건, 폭력 경찰로부터의 피신처를 제공하며 응원하던 시민들도 있었고, 경적을 울리며 연대를 표시하던 운전기사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넥타이와 셔츠 바람으로 함께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 구호를 외치던 회사원들도 있었고, 전투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히던 학생과 시민들을 '때리지 말라!"며,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던 시민들이 있었다. 시위 진압에 지쳐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사복 경찰조에게 꽃을 건네는 수녀님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87년 그날 역사의 현장에서 뜨거운 주인공이었다. 그들의 수많은 선한 선택이 모여 변화를 가져왔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역사를 움직였다. 


모든 것은 그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 편에는 폭력과 잔인함으로 선한 이들의 의지를 꺾고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도 당연히 있었다. 유신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하극상의 쿠데타로 자신의 상관을 물어뜯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세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문과 은폐를 자행하던 권력의 하수인들도 있었다. 상관의 명령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 자신과 같은 또래의 청년들에게 최루탄을 쏘아야 했던 전투경찰도 있었고, 어느덧 습관처럼 폭력의 단맛에 길들여져 적극적으로 학생과 시민들에게 야만적인 물리력을 가하던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 체포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으로 파렴치한 군사정권의 폭력적 지배 도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공권력이 있었다. 이 공권력의 폭압에 1987년 1월 스물두 살의 한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영화는 그 죽음에서 시작해서 그 죽음을 감추려는 세력의 음모와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세력의 용기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진실과 인간의 편엔 선 사람들의 선택이 가져온 변화를 추적한다. 그 선택들이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변화시켰는지, 그 선택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용기를 냈으며, 어떻게 해서 87년 6월의 그 뜨거운 함성이 거리를 메울 수 있었는지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태생부터 민주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의조차 결여된 전두환 신군부의 제5공화국은 인권유린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정치세력은 '좌경 용공 세력'으로 매도당하거나 수많은 조작 사건을 통해 북괴와 내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빨갱이'로 체포, 구속되기 십상이었다. 경찰과 검찰, 관공서의 벽면을 장식한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제5공화국의 국정지표가 극단의 반어법 혹은 공허한 '정치적 수사'로서만 박제되어 있던 시대였다. 많은 선한 이들이 군사독재의 종식과 기본적 인권 보장,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국가 기관에 끌려와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어야 했다. 


 

1987년 1월 14일 스물두 살의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 박종철(영화에서 여진구 분)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모진 폭행과 물고문을 당하다 끝내 욕조에 목이 눌러 질식사하고 만다. 영화 <1987>는 바로 그 죽음에서 시작한다.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던 경찰은 학생운동 세력과 재야 세력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 일망 타진하려는 공안사건을 기획하다 무리한 수사 끝에 무고한 대학생을 물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치안본부 박처원(김윤석 분) 대공 처장의 지휘 하에 경찰은 박종철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 했으나 최환(하정우 분)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다. 박종철의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시신을 부검하려는 최환 검사에게 던지는 "아 새끼 빨갱이가?"라는 박 처장의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세상은 '빨갱이'와 '빨갱이 아닌 자' 밖에 없다. 


모두의 선한 선택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영화에서 잘 보여주고 있지만, 전두환의 제5공화국 당시에는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나 검찰보다 경찰이 정권 유지의 도구로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신군부는 검찰보다 경찰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권력의 시녀로 적극 활용했다.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도 검찰보다 경찰의 힘이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경찰에 의한 인권유린과 불법 수사가 자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과 경찰 간에는 묘한 긴장과 견제의 역할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도 이런 긴장관계는 최환 검사 역을 맡은 하정우가 "지난번에도 경찰 하자는 대로 했다가 우리만 다 뒤집어썼다"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경찰의 자의적 법집행과 반인권적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최환 검사는 경찰과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의 주검에 대해 시신 보존 명령을 내린다. 그의 선택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수많은 의문사와 달리 역사의 암흑 속에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최환 검사는 나중에 서울지검 검사장으로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기소한다.

 


마찬가지로 박종철의 죽음을 감추려는 경찰의 은폐 시도는 경찰에 대한 검찰의 소극적인 견제로 실패한다. 영화 속에서 검찰은 출입기자에게 경찰의 수사 도중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했다는 암시를 준다. 경찰의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검찰로부터 박종철 군 사망에 대한 암시를 얻은 중앙일보 신성호(그는 영화에서 전화로 특종을 알리고 들이닥친 경찰을 피해 전화를 채 끊지도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으로 나온다.) 기자의 보도로 1월 15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처음 세상에 알려진다. 

언론의 보도와 검찰의 시신 부검으로 박종철 사망 사건의 은폐 시도가 실패하자 강민창(우현 분)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김윤석) 치안감이 1월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박종철 군이  “심문 도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사망하였다”는  황당한 수사 발표를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박종철 군 사망 직후 심폐소생술을 위해 불려 간 중앙대병원 의사 오연상을 만나 마침내 물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확인한 동아일보 윤상삼(이희준 분) 기자의 보도로 경찰의 고문치사 가능성이 제기된다.  게다가 1월 16일 박종철의 시신 부검에 참가한 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김승훈 분)은 경찰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1월 17일 박종철의 사인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힌 보고서를 작성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권력의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진실에 편에 서는 언론과 전문가의 역할과 선택이다. 5 공화국 당시에는 이른바 '보도지침'을 통해 정권의 언론에 대한 감시와 검열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은 자신들의 역할을 출입처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정리해서 요약하는 데 국한하지 않고 목숨을 건 취재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혹한 군부독재의 검열과 폭력적인 공권력의 감시가 서슬 퍼렇던 시대였음에도 언론인은 기개가 넘쳐흘렀다. 전문인 혹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부검의사 황적준의 경우도 불의와 거짓에 맞서 진실의 편에 서는 용기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편의와 정치적 이익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취사선택하여 진실이라고 호도하는 요즘의 일부 전문인, 지식인과는 차원이 다른 결기를 보여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와 후속 보도를 쏟아낸 언론사들



어둠은 진실을 감출 수 없다!

더 이상 박종철의 죽음을 감출 수 없게 된 경찰은 1월 19일 강민창(우현) 치안본부장이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가혹행위로 인한 박종철 군 사망을 시인했지만, 경찰은 수사관 조한경(박휘순 분)과 강진규(박지홍 분) 2명 만을 고문 경찰관으로 지목해 구속하는 등 계속해서 사건을 축소하며 부검을 거친 박종철군의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후 구치소 보안계장은 접견 과정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에 가담한 고문 경찰관 3명이 더 있다는 사실과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알아차렸다. 영화 속에는 교도소장 안유(최광일 분)와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분)이 이 사실을 당시 시국사범으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에 있던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김의성 분)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부영 의장은 경찰의 축소 은폐 사실을 적은 쪽지를 한재동(유해진이 연기한 한병용은 실제 인물 한재동 교도관과 다른 교도관 전병용을 합성해서 설정한 가상의 캐릭터다)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영화에서는 한병용이 조카 연희에게 심부름을 시켜 수배 중인 재야 운동권 인사 김정남(설경구 분)에게 그 쪽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영화적 설정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이한열을 만나게 되는 연희가 불의에 맞서는 삼촌의 저항과 이한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6월 항쟁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당연히 영화적 설정이다. 그러나 6월 항쟁의 범국민적 지지와 보편적 확산을 고려해 본다면 이런 가상 인물의 설정이 전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고 개연성을 담보한 구성으로 받아들여진다. 



6월 민주화 항쟁은 어떻게 가능했나?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및 은폐 조작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4.13 호헌 조치 통해 '현행 헌법 하에서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를 통한 정권 이양'이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전국민적 저항과 반발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이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고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영등포 구치소 교도관들과 이부영 의장의 활약으로 밝혀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었다. 결국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김승훈(정인기 분) 신부와 함세웅 신부는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 은폐 사실을 폭로한다. 김승훈 신부는 이부영 의장의 옥중 전언을 토대로 박처원 치안본부 5 차장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의 경찰 수사관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가담하였으나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사건을 축소 조작하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으로 회유했다 사실을 새롭게 폭로했다.



명동성당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경찰과 정권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대규모로 일어난다.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독립운동 세력과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인 6월 10일에 범국민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전두환은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고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에 임명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 지도자들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어,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며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목표로 민주화 시위를 조직해 나갔다. 




또 하나의 죽음, 또 하나의 희생!

6.10 국민대회 출정식을 진행하던 6월 9일 연세대 시위에서 경영학과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다 쓸어진다. 그의 마지막을 부축하는 친구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파를 탔고, 연이은 젊은 대학생들의 잔혹한 죽음은 군사정권과 경찰의 살인적 시위 진압에 대한 국민적 공분과 저항을 일으킨다. 영화는 한열의 죽음에 각성하여 새로운 주체로 탄생한 가상의 인물 연희가 6월의 거리로 달려 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렇게 영화는 198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두 젊음의 죽음,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이한열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모습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87년의 상황과 아쉽고 허무한 결말은 이렇다. 6.10 범국민 규탄 대회 이후에도 일부 시위대가 명동 성당에 남아 철야 농성 시위를 계속했고 시위는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내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전국민적 시위로 시위 양상이 달라지고,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 참여로 물리력에 의한 진압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6월 29일 노태우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한다.





남은 이야기들

<6.29 선언>은 전국적 저항에 부딪힌 당시 집권 여당 민정당 대선후보 노태우가 내놓은 시국수습 방안으로 그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정치범 석방 및 사면복권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주장해온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한 수습책이었다.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국민들의 바람대로 16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져 민주적 정권교체에 성공하여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수한 선한 사람들의 희생과 분노로 얻어낸 민주화의 결실은 안타깝게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가 6.29 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 개정 하에 치러진 제13대 대선과 이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의 분열까지 담지 않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부터 20년이 흐른  2007년 한 국내 언론사가 서울지역 4개 대학 108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6월 민주화 운동이 1987년에 일어났음을 모르는 학생들이 68%, 박종철과 이한열이 6월 민주항쟁과 연관되어 있음을 모르는 학생들도 67%에 달했다고 한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에게 1987년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의 뜨거운 열기와 감격의 기억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된 2017년, 이들 대학생들도 30대가 넘었겠지만 영화 <1987>이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감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주인공들이 자신들과 같은 푸르고 빛나는 스물의 청춘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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