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로츠뎀 Nov 04. 2021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지만, 신비롭고 경이로운 신규 공무원 시절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시절

공직에 임용된 후 내가 처음 근무를 시작한 곳은 원래 살던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강원도 어느 작은 군 지역이었다그곳엔 예전부터 황태 덕장이 많았다고 한다겨울이면 주먹만한 눈송이가 심심찮게 날리고겨울바람이 마치 고추냉이 덩어리를 씹었을 때처럼 얼얼하게 머리속까지 내리 꽂히던  곳이었다그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보라 속에 알몸으로 덕장에 매달린 채 명태는 살이 터져나가 먹기좋은 부드러운 육질의 황태가 된다고 한다저녁 7시만 넘어도 거리엔 인적이 드물어졌다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인 집까지 퇴근할 때면 머리 위로 쏟아질듯한 은하수를 맨눈으로도 목격할 수 있었다멀티플렉스는커녕 변변한 극장하나 없고친구나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TV나 인터넷도 없이 지내면서도 나는 그곳 생활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이유는 바로 내가 신규 공무원이었기 때문이었다그 시절의 내겐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왔다.

    

눈보라 속에서 살이 터져나가지만 맛은 좋아지는 황태처럼 


     

신규 공무원에겐 모든 일이 낯설고 서툰 것이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모든 것이 경이롭고 재미있기도 했다공무원들은 문서로 말한다는 말이 있듯이 다들 각자의 모니터를 주시하며 문서를 만들어 냈다공문서의 마지막은 항상 ''자를 붙이며 끝내야 한다는 것도 내겐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한때 어느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 중에모든 말에 ''자를 붙이는 개그맨이 있었는데그 코너가 생각나기도 했다직원들끼리 대화할 때도 장난삼아 말 끝에 ''자를 붙이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무엇하나 쉽지 않은 신규 공무원 시절

물론 신규 공무원 생활이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기 마련이다선거가 시작되면 하루 종일 쉴새없이 전화통이 울려댔다전화 응대는 막내의 몫이어서 주로 내가 전화를 받아야 했다대부분 항의성 민원전화와 선거법 질문에 관한 것이어서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신규 직원에게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았다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퇴근해 잠이 들 때에도 머리 에서는 계속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책으로만 공부한 법 지식는 현실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먼저 뛰기도 했다지금은 노련하게 민원인이 질문한 핵심내용과 연락처를 메모하고, "관련규정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하고 여유있게 응대를 하지만 '처음'엔 전화 응대도 참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수'인 사람은 없다

     

     

     

늦깍이 공무원의 특별한 경험

     

더구나 나는 오랜 동안 사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가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공직에 입문한 이른바 '늦깍이 공무원'이어서 모든 경험이 더욱 새롭고 독특하게 다가왔다물론 나와 함께 생활해야 했던 다른 직원들에게도 내가 참 특이하고 신기한 '막내'였으리라. ‘풋풋한 막내를 기대했겠지만 숙성된 막내가 등장한 것이다내가 처음 근무하게 된 곳에서 나는 기관장인 국장님을 제외하면 제일 나이가 많았다이제 막 승진한 가장 나이어린 직속 계장님하고는 거의 스무살 차이가 났다나중에 그 계장님은 인사이동으로 송별식을 하는 자리에서 "사실제가 주무관님 기세에 눌릴까봐 주무관님에게 좀 더 혹독하게 한 면도 있었어요. ㅎㅎㅎ"라는 속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아무튼 내게도 공직 생활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던 것처럼나를 만난 다른 직원들에게도 내가 때론 이질적이고 두려운 '타자'로 다가왔던 것 같다그래서 가끔은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고가끔은 아무 것도 모르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 '미생'이면서도,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오과장'처럼 느꼈는지도 모른다사실 불쑥 불쑥 동료들이나 계장님이 나를 '과장님'이나 '계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갑자기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어떤 때는 내가 사무실에서 '막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동료도 있었다

     

     

'장그레'인듯 '오과장'인 신규 공무원

     

예를 들어 이런 일도 있었다당시 내가 일하던 청사는 우리 직원들만 근무하는 단독청사여서 별도의 관리인이나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또 부족한 예산 때문에 직원들이 청사 청소를 직접해야 했다심지어 화장실 청소까지 직원들이 도맡아해야 했는데그런 일은 당연 사무실 '막내'의 몫이었다.  그런데사무실 '막내'로서 나도 최대한 열심히 청소를 한다고 한 것 같은데 다른 동료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한번은 "막내면서도 왜 막내답지 않게 화장실 청소도 안 하느냐?"는 불만을 토해놓는 동료도 있었다.  물론그런 오해나 불편한 감정의 대부분은 함께 힘든 선거를 치르고같이 밥도 많이 먹고, 술잔도 기울이며 서로 친해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에 대한 동료들의 선입견이나 껄끄러움(?)이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내가 업무에 익숙해지면서라고 생각한다이제 막 공직에 첫발을 디뎌복사기 사용법조차 잘 모르고공문서 작성법도 잘 모르고민원전화 응대도 매끄럽지 못하고필요한 물품이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어수룩한 존재는 쉽게 사무실의 표적이 된다스트레스는 절정을 향하고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는 바쁜 선거시기에는 특히 어설프고 질문 많은 신규직원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따라서 동료직원들이 쉽게 불만을 쏟아낼 배수구가 되기 쉽상이었으리라.  

     

     

처음부터 사수인 사람은 없다

최근하반기 정기인사가 끝나고 우리 기관에는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신규 직원들이 대거 배치되었다생기발랄하고 텐션 그득한 그들의 얼굴과 몸짓을 보면서 나의 '처음'이 많이 생각나는 요즘이다그들의 그 생기발랄함 뒤에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어설픔이 가려져 있을 것이다그들도 나의 '처음'처럼 사무실의 전화벨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종종 만나게 되는 민원인의 거친 분노와 차가운 무례함에 적지않게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우리 모두 한 때 어린 존재였고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처음'이 있을 터이니까어쩌면 길고도 짧은 우리 삶에서 우리 모두는 좀 더 배워나가고 조금 더 나아질 뿐저마다의 결핍을 지닌 '미생'일지도 모른다처음부터 사수인 사람은 없었고그렇게 우린 가끔 헛걸음질 치면서도 조금씩 스스로 '사수'가 되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턱' 너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