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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y 30. 2024

태초에 '간식'이 있었다

괴물은 누구일까 _02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엄청난 일도 처음에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난해 초 우리 기관의 중앙 부처에서 근무하던 P에게 일어난 일도 시작은 어찌 생각해 보면 같이 일하는 동료 사이의 사소한 견해 차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시작은 아주 미세한 파동 같은 간식 문제였죠.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간식'이 있었던 겁니다.


제가 다녔던 일반 회사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도 공무원 조직에서는 부서별로 간식거리를 사서 쟁여 두는 일이 흔합니다. 직장에 간식 드시러 오시는 것은 아닐 텐데 유난히 간식에 집착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더군요.  근데 이게 웃기는 게, 별도 예산으로 부처별 '간식비'가 따로 책정되어 나오는 것도 아니죠. 보통 민원 응대용이나 행사용 예산을 각 부서의 회계담당이 적당히 활용해서  음료수나 간단한 다과를 구비하는 거죠. 근데 공무원 조직에서는 이게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부처별로 직원들이 먹을 각종 음료수나 과자 등을 대량으로 구비해 놓더군요. 간단한 다과에서 더 나아가 라면류, 견과류, 컵밥까지 아예 끼니를 때울 비상식량처럼 성대하게 구비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런 간식을 구비하는 일은 보통 해당과 막내인 서무가 맡게 되죠.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용어인 서무(庶務)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을 말해요. 보통 어떤 모임의 총무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종종  사내 자유게시판에 올라오는 서무의 애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끝도 없을 겁니다. 서무 업무 중에 대표적인 업무가 바로 각 부처의 간식 구비, 회식 때 맛집 사전조사 및 예약, 야근하는 직원이나 혼밥 못하시는 국 과장님 끼니 챙겨드리기, 뒷손 없는 분들 위해 간식 타임 후 뒷정리 등등입니다. 심지어 국 과장님 야근 시에 서무가 남아서 끼니 챙겨드리지 않는다고 서무 타박하는 분들도 아직 있습니다. 


국장님 스타일에 따라 서무에게 아침마다 국장님 테이블 닦아 놔라, 상큼하게 모닝커피 타다 드려라('역시 커피는 여직원이 타온 커피가 더 맛있다'는 국장님도 있죠), 밥은 매일 같은 메뉴 말고 다양하게 골고루 영양 챙겨서 주문해라 하는 곳도 있죠. 그리고 이런 황당한 요구와 지나친 역할기대는 여성이 서무를 담당할 때 더욱 심해집니다.  한마디로 서무는 조직에서 누구도 하기 싫은 다양한 잡일을 도맡아 하는 거죠. 구시대적이고, 권위적이고 차별적인 조직문화의 민낯이 서무에 대한 요구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죠. 요즘은 많이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런 시대착오적 조직문화가 MZ세대들이 공무원 조직에 적응하기 어렵고 퇴사하게 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날은 바로 2023년 상반기 인사이동으로 p가 새로 근무하게 된  부서의  과장님 생일이었습니다. 여기는 아직도 직장에서 직원들 생일 파티를 해줍니다. 한두 명도 아닌 직원들 생일 챙겨서 선물 준비하고 맛있는 간식도 준비해야 하는 게 서무의 본분이라고 합니다. 부처 조직 개편과 이사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와중에도 p는 과장님 생일 파티를 위해 직원들에게 피자를 시켜드렸죠. 신생 부서의 서무를 맡게 된 p는 이사와 창고정리, 재물조사, 관서운영경비 출납을 위한 통장개설 및 카드발급 등 신설과의 운영 체계 구축을 위한 행정처리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과 살림의 기본 체계를 전부 새로 만들어야 했던 신생과의 서무로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1월 11일이었으니 아직 정부 구매카드도 발급되지 않았고, 과비도 없는 상태에서 개인카드로 과장님 생일파티를 위해 피자를 시켜드리고, 직원들이 함께 먹는 자리였습니다. 어떤 직원은 피자가 입맛에 안 맞는다고 굳이 컵라면을 먹고 늘 하던 대로 국물만 남은 빈그릇은 치우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죠. 아무튼 대체로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들며 간식을 먹었죠. 



그 생일 파티 자리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과장님은,

"냉장고는 언제 채울 거야?"라고 전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p에게 말했고,

당시 이미 음료수가 냉장고에 많이 있었고, 이전에 근무했던 과에서는 일찍이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당황한 P는 진심 궁금하여 조심스레,

"냉장고에 뭘 더 채워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계장님은 마치 스무고개 하듯, 

"냉장고에 뭘 채우겠어요?"라고 반문하셨죠.

그러더니 다른 직원분들의 간식비교 및 간식의 중요성에 대한 일장 연설이 10여분 동안 이어집니다.

"아, 간식은 너무 중요하지. C과는 마치 편의점 같더라고요, 없는 게 없어!"라는 비교에서부터 

"내가 서무 할 때는 30만 원으로 얼마나 간식을 잘 챙겼는지 칭찬게시판까지 올랐다니까요!"라는 

자화자찬까지 간식의 중요성에 대한 훈계가 간식 타령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면전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다른 과와의 간식비교와 품평에 

조리돌림 당하는 기분이 들고 당혹스러웠던  P는, 

"아... 간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벌써부터 부담이 크네요"라고 하며 

그 자리를 정리하려 했지만,

눈치는 손톱만큼도 없던 몇몇 남직원들은 상황파악도 못하고,

마치 서무 조리돌림 같은 간식비교를 이어나갔죠. 

답답한 마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원하시냐?"라고  물었지만 답은 없고 간식 타령만 계속 해댔죠, 



요즘이야 그리 못 먹고사는 시대도 아니고, 영양 섭취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서무가 본인들 아내나 엄마도 아닌데, 요즘은 아내나 엄마한테도 그러면 안 되는데,  

왜 직장에서 어린애들처럼 간식 투정을 부리는지 P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죠. 

그리고 놀라운 것은 당시 해당과에는 이미 4층 선반 가득 각양각색의 간식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과자류, 견과류, 소시지, 사탕 및 초콜릿, 미니 약과, 라면류(햇반 및 짜장 포함), 누룽지,

시리얼, 컵밥(미역국, 황태콩나물국밥)'이 탕비실 4층 선반에 구비되어 있었죠. 

옆 부서의 과장님은 종류별로 음료가 가득 찬 그 과의 냉장고를 보고 화들짝 놀라시며 

"여긴 왜 이리 간식이 많냐!"라고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죠.



새 부서가 탄생하여 만난 지 열흘남짓 된 연초, 그 바쁜 시기에 해당과 서무인 p 면전에서 듣기 불편한 타 부서와의 간식비교를 꽤 오랜 시간 하면서도 정작 구체적으로 원하는 품목은 말하지 않는 무례함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죠. 조리돌림식 간식비교에 마음을 다친 p는 고심 끝에 다음 날 직원분들에게 메일로 본인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생일 파티 자리에는 해당과 초기 멤버 분들이 모두 있었으므로 이해와 공감을 얻고 싶었던 p는 조심스레 전 직원분들께 단순 간식비 교은 자제해 주시고, 원하시는 구체적인 간식 품목을 알려주시면 구비해 놓겠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한 계장님이 "메일 내용이 상당히 불쾌하다"며 공격적인 답메일을 보냅니다.

p는 단순 간식 비교로 마음이 많이 상해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조심스레 직원분들의 이해와 공감을 기대하고 쓴 메일이었지만,

오직 그 계장님 한분만은 '동감'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한말은 무례하게 느끼면 안 된다'는 해괴한 논리와, 

'할 말을 다한다, 앞으로 잘 근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라"는 

위협적인 경고의 공격 메일로 굳이 회신을 주시니,

사람마다 감수성과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 p는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메일은

지신들의 말은 농담이었으니 무례하게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주무관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무례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권위의식은

자신들의 의견은 '좋은 생각'이거나 아니면 '농담'이라고 간주하고, 

자신들과 다른 견해는 '분란'과 '무례'로 간주하는 독선을 드러냈습니다.

그 부서의 선임 계장이 보낸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공격적인 메일은

P에게는 거의 '두고 보자'는 위협으로 느껴졌죠.

그래서 P는 직속 계장님에게 이 분의 공격적인 메일을 보여드리고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직속 계장님은 이에 대해 어떤  후속 조치를 취하는 대신 

그저 "저분은 4월이면 이 부서에서 나갈 분이니 힘들더라도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죠. 



그래서 P는 괴롭고 모욕적이었지만 이후 일절 대응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P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미세한 파동에 불과했던 '간식 이슈'와 공격적인 메일이 

이후 그 계장님과 일부 직원들의 갑질, 괴롭힘으로 이어질 줄은.

이 '태초의 간식 이슈'가 이후 저열한 '사내 정치'와 부당한 감사절차, 부실한 고충처리 절차와 맞물려 

쓰나미처럼 몰려올 줄은. 

여기에 관리자인 부서장의 갈등관리 능력 부족, 

인사상 업무상 고충을 토로하는 p의 문제제기에 대한 직속 계장님의 부적절한 대처가 더해져 

거대한 폭풍우가 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P는 이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갑질에 외롭게 홀로  일 년 내내 맞서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태의 근저에는 간식 이슈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제기조차 권위에 대한 도전, 조직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조직의 폐쇄성과 견고한 권위주의가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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