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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r 19. 2019

어떻게 인간은
새로운 야만상태에 빠지게 되었나

권용선의 책 <이성은 신화다 : 계몽의 변증법>

오늘 소개하는 책은 <그린비> 출판사가 기획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중 여덟 번째인 권용선 작가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지닌 인문사회, 철학 분야 고전을 새롭게 해석해 주는 기획입니다. 저는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외에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이 유쾌한 시공간>,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은영의 <순수이성비판> 등을 읽어 봤습니다. 이 시리즈는 선뜻 손에 쥐기 어렵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낯선 문장과 번역투의 원작을 익숙한 우리말과 우리 시대의 문체로 풀어주는 고전 해설서이기에 고전을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던 저 같은 비전공자들이 읽기에 좋을 듯합니다.  

<이성은 신화다:계몽의 변증법> 그린비

책에 대하여

권용선의 책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은 제목처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새롭게 해설해 주는 해설서입니다. 따라서 책의 주요 내용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루는 계몽 비판과 파시즘 분석이며 책의 형식도 <계몽의 변증법>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은 원래 '계몽의 개념'이라는 본문에 해당하는 하나의 논문과 그 본문에 붙은 두 개의 부연설명, 그리고 부록에 해당하는 두 개의 추가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도 기본적으로는 원래의 책과 유사한 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수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원 저작 <계몽의 변증법>은 유대인 출신 독일 철학자였던 저자들이 1930년대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잃고 망명해야 했던 미국에서 쓰인 책입니다. 책의 바탕이 된 초고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주고받은 대화를 아도르노의 아내가 녹음한 것이었고 '철학적 단상들'이란 부제가 붙은 책은 1944년 완성되었으나 출판된 것은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였습니다. 당시 독일 출판사들은 유대인 저자들의 책을 출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어판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에 대하여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 중에 한 명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189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유대인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갖었던 호르크하이머는 인생의 친구가 된 프리드리히 폴록을 만나 철학과 문학, 정치학과 심리학 등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함께 공부합니다. 1930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철학 교수가 된 후 대학 부설 <사회연구소> 소장이 되어 폴록, 아도르노, 프롬, 뢰벤탈, 마르쿠제, 벤야민, 하버마스 등과 함께 '비판이론'으로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룹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20세기 사상가 중에 가장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는 190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역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악가수였던 어머니와 피아노 연주자였던 이모와 어린 시절을 주로 보낸 덕분에 '음악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라고 믿으며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아도르노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음악과 철학을 결합하고 싶어 했으며, 1925년에는 쉔베르크에게 음악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기 위해 빈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빈에서의 음악공부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후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돌아와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사회비판과 철학 연구에 몰두합니다. 나치의 압박을 피해 처음에 영국 옥스퍼드로 망명했다가 지적 관심사와 문화적 취향의 상이함으로 인해 영국을 떠나 결국 호르크하이머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쓰게 됩니다.    


계몽의 변증법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계몽의 변증법>은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횡횡하던 암울한 시기에 쓰인 책입니다. '아우슈비츠'로 귀결된 파시즘의 광기에 인류가 절망하던 시기. 문명과 발전의 명목으로 나치가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은 서구 지성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하는 자괴감과 절망 가득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문명의 발전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전쟁의 광기와 파시즘의 폭력 속에서 탄생한 책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과 이성, 진보와 문명에 대한 부정과 비판으로 가득 차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사유'라고 불립니다.

유대인 포로

결국, 계몽과 이성이라는 진보의 도구로 무장하고 합리적인 역사발전을 추구했던 인류가 수백만명의 무고한 생명을 살해하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왜 인류는 역사적 진보의 한 극단에서 인종적 편견과 전체주의적 획일성으로 요약되는 파시즘을 만나게 되었는지? 왜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진보 속에는 부정적인 것이 포함되고, 그 부정적인 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필연적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지? 인간을 위한 진보와 발전이 억압과 파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류문명의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계몽과 이성의 체계를 그 근원에서부터 파헤치는 것입니다. 이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계몽과 이성의 체계 자체에 내재한 동일성의 사유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이었고, 중심화되고 체계화되고 반성하지 않는 사유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상기시키는 일이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긴장하는 주체를 통해 이성을 계몽하는 것 즉, 계몽의 계몽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되어 버린 '계몽'을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계몽의 역사는 왜 퇴보하는가

도구적 이성으로 타락하여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된 '계몽'을 구해내는 일은 <계몽의 변증법>의 본문에 해당하는 '계몽의 개념'을 다루는 장에서 시작합니다. 이 장에서는 저자들은 '계몽'의 일반적인 내용과 자신들이 사용하는 '계몽'의 개념을 제시하고 '계몽'과 '신화'의 얽힘 속에서 '계몽'의 개념을 파악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계몽의 체계를 구성하는 두 가지 전략인 '반복과 언어'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어둠을 밝힌다 enlightenment'는 의미의 '계몽'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춤으로써 어둠의 공포를 몰아내고 그 대상을 지배할 수 있지만, 동시에 평화로운 숲을 순식간에 태워 버리는 화마로 돌변할 수 있듯이 그 안에 약탈과 지배, 야만의 얼굴도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들에게 "계몽의 역사는 발전과 진보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퇴보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들에게는 계몽, 이성, 문명, 빛이 하나의 범주이고 신화, 비이성, 야만, 어둠은 또 다른 범주로 묶일 수 있는 것이지만,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 신화와 계몽, 문명과 야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고, 계몽은 다시 신화로 돌아간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계몽의 개념'에서 저자들은 계몽의 역사가 보여준 퇴보의 경로를 보여주며 그 과정 속에서 계몽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는 것, 즉 '계몽을 계몽하는 것'을 자신들의 전략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계몽 안에 들어 있는 자기모순을 밝혀내고 계몽의 과정 속에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부정과 반성의 사유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말하는 '계몽의 변증법'입니다.

주체의 탄생: 오디세우스의 경우

신화에서 계몽으로: 주체의 탄생

권용선의 책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3장 '오디세우스, 주체의 탄생'은 <계몽의 변증법>의 '계몽의 개념'에 대한 첫 번째 부연설명입니다. 저자들은 여기서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를 통해 신화 속에도 계몽은 존재하며, 주체는 신화의 세계를 탈출함으로써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천신만고 끝에 귀향하는 과정을 다룬 <오디세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방해하는 칼립소, 키클롭스, 스킬라, 사이렌 등의 괴물과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신의 형상을 한 자연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지식과 책략을 통해 이들 신들과 싸워 이기고 귀향하는 과정은 무한히 허약한 인간이 이성적인 '자아'를 형성하며 서서히 탈자연화, 탈신화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계몽의 과정입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오디세이>라는 문학적 텍스트를 분석하여 자신들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은 매우 이채롭고 매력적입니다.

계몽의 마녀, 줄리엣

계몽에서 신화로: 계몽의 타락

4장 '줄리엣, 계몽의 마녀'는 '계몽의 개념'의 두 번째 부연설명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과 관련된 글입니다. '오디세우스, 주체의 탄생'이 이성적 자아가 어떻게 신화에서 탈출해 계몽으로 나아가는 지를 보여줬다면 4장 '줄리엣, 계몽의 마녀'는 그 계몽된 이성이 어떻게 다시 신화로 떠어지는 지를 보여줍니다. 이 과정을 칸트의 계몽 개념에 내포된 개별적 차이를 무화시키는 보편적 자아와 특수자로서의 자기 유지의 성격이 칸트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단순히 계산하고 계획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사유는 의미를 포기해 버리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저자들은 사드 백작의 소설 <줄리엣의 역사>를 통해 계몽된 이성이 감성의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체계화시킴으로써 어떻게 다시 이성이 신화의 세계로 추락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계몽된 이성과 그것의 도구적 활용에 대해.


계몽과 문화산업, 파시즘

5장 '계몽, 문화라는 옷을 입다'는 <계몽의 변증법>에 실린 <문화산업: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저자들은 여기서 대중들이 어떻게 문화산업에 감염되어 비판적 사유의 힘을 잃어버리고 갈등 없이 파시즘의 체계로 편입되는지,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물화된 이성이 어떻게 반성적 기능을 상실하는지, 문화산업이 '문화'를 상품화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들이 대중문화의 이념적 성격만 지나치게 부각하고 대중문화의 자발성이나 성장 가능성을 무시한 측면은 아쉽지만 대중문화의 몰가치성과 획일성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파시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6장 '파시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반유대주의적 요소들:계몽의 한계' 부분에서 다룬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파시즘의 지배전략의 문제 차원에서 다룹니다. 파시즘을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이성이 약자를 지배하는 체계로 본다면, 남성 우월적 권력에 항의하는 페미니스트, 외국인 노동자 및 이민자, 성소수자 등과 관련하여 '특수자'와 '차이'를 문제 삼는 우리의 '파시즘적 문화구조'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좋은 점

권용선의 책을 읽으며 제가 좋았던 점 몇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우선 모든 철학은 그 시대의 자식이기에 그 철학을 탄생시킨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점에서 저자가 1장에서 <계몽의 변증법>의 두 저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간략한 전기를 제시한 것은 참 유익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자는 두 사람의 전기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자신이 독자들에게 자신들을 소개하는 가상의 자서전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음이 매우 흥미롭고 유익합니다.

 두 번째, 기본적으로 원저인 <계몽의 변증법>의 원래 형식을 따르면서도 어렵고 난해한 원저의 문체와 설명방식을 뛰어넘은 부분이 좋았습니다. 이는 '리라이팅'이라는 기획 취지에도 부합하는 것이고, 번역문의 껄끄러움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가독성을 높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저자가 '계몽'이나 '변증법', '이디오진크러시 Idiosyncrasie' 등 어려운 철학용어나 심리학 용어를 풀이해주는 친절한 설명이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을 소개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나 우화 등도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자의 친절함과 명료함이 제가 이 책의 끝까지 달려가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해설서인 권용선의 책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역시 저자의 친절함, 배려심에도 불구하고 원저의 불편함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이성과 계몽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반성적 사유의 필요성은 <계몽의 변증법>이 나온 지 7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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