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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r 17. 2019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올리비아 콜맨, 엠마 스톤 주연 영화 더 페이버릿

란티모스 감독의 최신작인 이 영화 <더 페이버릿 The Favourite : 여왕의 여자>는 보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영화네요.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 독특한 촬영기법, 적절한 대사와 긴장감 있는 플롯 모두 탁월합니다. 고민하실 필요 없이 그냥 보시면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 리뷰는 영화를 먼저 보신 뒤에 읽어보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저는 관심사인 권력관계의 보편성과 권력 작용의 특수성에 주목해서 리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포스터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영국여왕 앤과 그녀의 총애를 얻기위해 싸우는 두 여자들의 치열한 권력투쟁입니다. 이 영화는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하는 권력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각자의 권력기반과 자질, 능력,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권력의 구체적 모습을 그립니다. 때로는 엄격하고 냉정하다가 때로는 변덕스럽고 즉흥적이고, 때로는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우승꽝스럽기도하고 때로는 어안렌즈로 찍혀진 화면처럼 초현실적으로 왜곡되어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 이 영화는 18세기 영국 궁정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자들만의 권력 투쟁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보편적인 권력투쟁의 과정을 그립니다. 권력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소멸해 가는 지를. 때론 달콤하기도 하고 때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때론 위태롭기도 한 과정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여왕 앤과 그녀를 둘러싼 두 여자의 권력 투쟁을 그리고 있는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입니다.  이전에 <송곳니>, <킬링 디어>, <더 랍스터>를 만든 그리스 출신의 란티모스 감독은 다소 잔혹하고 자극적인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영화 속에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본능을 상징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출연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토끼, 랍스터, 오리 등등이 출연합니다. 그 의미를 해석해보는 것도 영화 보는 재미를 배가시켜줄 듯싶습니다. 시대극인 이번 영화는 란티모스 감독의 어떤 영화보다 따라가기 쉽습니다.

앤 여왕

영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4)에서 프랑스에 한 차례 승리를 거둔 18세기 영국 앤 여왕 시대의 궁정과 그녀의 밀실입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합쳐 처음으로 대영제국을 만들었던 앤은 평생 통풍 등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17명의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하거나 사산으로 모두 잃었습니다.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이 49세에 죽었으니 어른이 된 이후 생의 대부분을 임신과 유산으로 보낸 거나 다름없었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앤의 내면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상처입니다. 몸이 비대했고 지적 능력이 낮아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 능력이 없었으며 누군가의 도움이 늘 필요했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이 바로 어릴 적 친구이자 밀실의 정부이자, 국정의 실질적 책임자인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레이첼 와이즈)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라의 먼 사촌이자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 애비게일(엠마 스톤)이 등장해 앤의 총애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말보로 공작부인 사라

영화는 이 세 여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권력투쟁, 각자의 권력게임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목처럼 영화의 주인공은 세 여자들이고 남자들의 비중은 미미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의 정당인 토리당과 휘그당 간의 전쟁과 증세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묘사되지만 부수적이고 세 여자 간의 권력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세 여자들의 남편들의 역할과 비중 역시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앤 여왕이 생전에 17번이나 임신을 했다면 남편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텐데 남편인 덴마크의 게오르 공(1653~1708)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도 말이죠. 세 여자 간의 권력 게임에 집중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인 듯싶습니다. 

애비게일 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앤 여왕과 그녀의 두 정부가 벌이는, 세 여자의 권력게임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 게임은 제목처럼 여왕의 호의(favor)를 얻기 위한 게임이기도 합니다. 여왕의 호의를 얻는 것이 곧 권력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호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기반한 것이어서 쉽게 변하고 옮겨 다니기 쉽습니다. 특히 마음의 상처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여왕의 호의는 더욱 쉽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토리당의 당수인 할리(니콜라스 홀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호의는 늘 바람처럼 방향을 바꾸지."
로버트 할리 경

그런데 이 영화가 기존의 시대극과는 다른 점은 궁정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단순히 여왕의 호의를 얻기 위한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 주인공이 서로의 호의를 얻는 복합적인 과정과 이를 자신의 권력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긴장감 있게 그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왕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단순 밀실 치정극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즉 세 여자가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벌이는 권력게임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비게일이 자신의 승리를 사라에게 최종적으로 선언하자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처음부터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어."

세 여자는 권력기반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왕인 앤은 신분과 혈통에 의해 부여받은 여왕으로서 공식적인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능한 귀족인 사라는 여왕이 갖추지 못한 실력과 지혜로 국정을 이끌 수 있는 관료로서의 능력에 기반한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여왕의 화장을 '오소리 같아 보인다'라고 꾸짖으며 여왕을 대신해 러시아 사절을 알현할 수도 있고, 궁정의 살림을 챙길 수 있으며, 전쟁을 위한 증세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제한적이긴 하나 나름의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론 여왕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여왕이 아끼는 토끼들과 인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한편 애비게일은 몰락한 귀족으로서 가장 취약한 권력기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채워주는 개인적인 수완에 기반합니다. 처음엔 사라의 호의를 이용해 궁정의 하녀로 들어오고 나중엔 여왕의 호의를 얻어 사라를 능가하는 권력을 얻게됩니다.

정리해 보면, 여왕은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권력기반이기에 가장 강력한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권력을, 사라는 때론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권력을, 애비게일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채워줌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심리적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세 사람의 관계도 권력관계입니다. 단지 그들의 권력기반이 다름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그들 간의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효과가 상이할 뿐입니다. 

서로 갖고 있는 권력기반이 다르기에 세 여자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보여주는 행동방식도 다릅니다. 무엇보다 신분제 사회인 18세기 영국에서 여왕은 권력의 최종 심급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여왕은 나야."라고 말하며, "내가 허락할 때만 말하도록" 할 수 도 있고, 의회에 나가 외교정책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도 있고, 밀실에서 그녀의 정부에게 "다리를 주무르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명의 자녀를 읽고, 온갖 질병 속에서 고통스럽게 지내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그녀는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갑작스레 변덕을 부려 무도회를 끊고 음악 연주를 중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17명의 아이를 잃고, 몸은 늘 고통스러운 통증을 일으키고, 국정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은 안 되는 앤은 사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왕을 대신해서 국정을 이끄는 사라는 실질적인 군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이 여왕의 총애 또는 호의와 자신의 능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기게 당당하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사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간신은 아니며 국가 이성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줄 아는 이성과 자제력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여왕의 목을 조르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권력은 막강하지만 진심으로 상처 받은 앤 여왕을 아끼고 사랑하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진심으로 여왕을 대하고 때론 국가적 이익을 위해 여왕의 뜻을 거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그녀의 권력기반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입니다. 

사라의 사촌이자 몰락한 귀족 출신인 하녀 애비게일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귀족 신분을 되찾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입니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인해 비천한 신분으로 추락해 노골적인 폭력까지도 경험해야 했던 그녀에게는 사랑도 무의미하고 오직 자신을 지켜줄 권력을 추구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어 궁정의 하녀로 채용해준 사라를 배신하며, 사라가 여왕에게 줄 수 없는 무조건적 애정과 정서적 위로를 바치면서 여왕의 호의를 얻습니다. 애비게일이 처음 앤 여왕의 호의를 얻는 계기는 여왕의 상실감이자 영혼의 상처, 17명의 아이를 상징하는 여왕의 토끼들과 놀아주기 시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라는 여왕의 토끼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지만 애비게일은 여왕의 감정에 공감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여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듯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여왕의 호감을, 곧 권력을 얻는 것입니다.  통풍을 앓고 있는 다리를 문지르는 행위는 여왕의 육체적 상처뿐만 아니라 성적 쾌락에 이르는 여왕의 모든 감정적 정서적 욕구 충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세 여자는 각자 가진 상이한 권력기반과 역학관계, 서로 다른 권력행사 방식과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을 보여주면 권력투쟁의 활극을 변주해 나갑니다. 이들의 권력관계가 흥미로운 점은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직선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복합적인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권력의 최종 심급인 앤 여왕도 혼자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기에 사라가 없으면 불안하고 우울한 의존관계입니다. 늘 여왕의 호의를 얻어야 권력이 유지되는 애비게일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 사라를 제거했어도 자신이 획득한 권력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자신이 획득한 권력의 부스러기를 달콤하게 맛보며 자신보다 더 미약한 존재를 상징하는 여왕의 토끼를 발로 밟아 보기도 하지만 이내 여왕의 '다리를 주무르라'는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왕이 어지럽다며 무릎 꿇은 애비게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장면과  이때 오버랩되는 토끼들의 이미지는 절대권력인 여왕도 스스로의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이며, 머리채를 휘어 잡힌 애비게일의 얼굴은 미래에 권력을 상실하고 머리가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애비게일의 위태로운 지위를 암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권력의 의미를 단순한 물리력의 의미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항상 권력이 문제가 됩니다. 권력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거지요. 부인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심지어 부모와 어린아이의 사이에서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권력관계가 존재합니다. 모든 존재와 존재 간에는 권력의지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물리적 폭력에서부터 상호의존 관계에서 작동하는 영향력, 서로 간의 의지의 작용을 의미하는 권력의지에 이르기까지. 이 권력의 보편성 속에서 어떻게 존재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어떤 형식과 내용의 권력 투쟁을 벌일 것인가는 결국 우리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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