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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pr 07. 2019

공무원만 끝이 어딘지 모르는 걸까?

공문서 작성 방식을 통해 보는 공무원 조직문화의 단면들

예전에 어느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 중에 말끝마다 '끝'이란 단어를 붙이던 개그맨이 있었다. 그래서였던가 내가 처음 공무원으로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재미있어했던 것은 공문서 작성에서 문서 내용의 마지막을 '끝'이란 단어로 끝나야 하는 거였다.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는 말이 있듯이 공무원들은 하루에도 수십 건의 문서를 생산해낸다. 보통 상급기관이 하부기관에 문서로 지침이나 업무지시를 내리고, 하부기관도 상부기관에 문서로 보고를 한다. 또 공공기관은 민원인 및 외부기관과도 '공문'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공문'의 끝은 '끝'이란 단어로 끝나야 한다.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처음 문서 작성을 할 때  나는 이렇게 모든 문서의 끝을 '끝'으로 끝내야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드디어 공무원으로서 전문적인 일을 하는가 보다 하는 자부심도 밀려왔다.

공문서 작성 예시

공문서는 보통 서신의 형식을 띤다. 그래서 문서의 맨 앞에는 문서 제목, 수신자, 발신자를 적고, 본문 내용을 적어 내려간 다음, 첨부 문서가 있으면 그 수에 따라 번호를 매겨 붙임 1, 2, 3,... 식으로 표시를 한 다음 마지막에는 반드시 '끝'이라고 표시를 하는 것이다. 요즘은 공문서 작성이 모든 기관에서 전자결재시스템으로 이루어지므로 문서 기안자가 기안을 하고 결재권자의 결재를 얻게 되면 기안자, 결재권자, 결재 일자 등은 자동으로 표시가 된다. 기관 내부용으로 별도의 수신자가 없는 내부문서는 보통 부서장의 결재를 얻고 직인을 찍고 나면 정식 공문서로 시스템에 등록됨으로써 문서 생성 절차가 완료된다. 그러나 상급기관이나 기관 외부로 송신하는 공문은 부서장의 결재가 끝난 뒤 발송 대기 상태가 되고 기안자가 발송 처리를 하게 되면 문서는 상급기관이나 해당 기관으로 전자문서 시스템을 통해 발송되게  된다.  만약 문서 수신자가 전자문서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해당 문서를 출력해서 우편으로 수신자에게 발송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통상적인 공문서 작성 과정이다.   

"도대체 왜 모든 공문서에다 '끝'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거지?" 


모든 공문을 '끝'으로 끝내는 방식에 재미있어하며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과 대화할 때도 말끝에 '끝'을 붙이는 놀이를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모든 공문서에다 '끝'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거지?' 보통의 공무원들은 이런 일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 오던 관행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은 피곤한 일이며, 그 오랜 관행의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왜 모든 문서에 끝을 붙이냐'는 제 질문에 선임자가 들려준 답은 '그냥 그렇게 해왔'고 '공문서 작성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문서에다 '끝' 자를 붙이면 문서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게 되어서 편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선임 직원의 대답을 듣고 나서도 제 의문을 가시지 않았다. '정말 '끝'자를 붙이지 않으면 공문서가 어디서 끝나는지 몰라 혼동이 올까?" "그럼 왜 다른 사기업이나 개인 간의 서신에서는 '끝'을 붙이지 않은 것일까?" "공무원들만 '끝'을 붙이지 않으면 문서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고 제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아 공문서 작성 규정을 찾아봤다. 공문서 작성 및 처리를 위한 근거규정이 여러 차례 개정되어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웠지만, 현재 공문서 작성의 일반원칙은 대통령령인 <행정 효율과 협업 촉진에 관한 규정 및 시행규칙>에서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문서의 끝에 '끝'을 붙여야 한다는 근거도 바로  "본문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끝" 표시 등을 한다"는 이 시행규칙 제4조 제5항 규정이었다. 


"보통의 공무원들은 왜라고 묻지 않는다."


결국 '끝'의 근거규정은 찾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끝'의 유용성과 필요성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끝'을 둘러싼 작은 논쟁을 통해 저는 공무원 문화의 한 단면을 느꼈다. 그것은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공무원 사회에서는, 공무원 조직 문화에서 '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공무원 업무의 대부분은 지침과 규정에 의해 반복적, 관행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사항들이며 처리하는 업무의 성격으로 인해 그 업무를 다루는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도 관행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행정직 공무원 업무의 대부분은 창의적인 기획력이나 응용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신고, 신청, 접수, 등록, 보고 등 단순 내용 심사 및 정리 업무가 많은 점도 이런 소극성을 강화한다.


공무원의 이런 관행적 업무처리 방식은 상황 변화와 예외에 대한 대처능력의 저하를 가져온다. 수많은 지침과  복잡한 규정을 확인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공무원 업무의 특성상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는 일선 공무원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런 공무원 업무의 특성은 조금씩 공무원의 의식과 문화까지도 잠식해 들어간다. 신규 공무원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느 선임 직원의 과도한 '휴먼명조체'에 대한 집착과, '맑은 고딕체'는 공문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어느 과장님의 소신도 바로 이런 공무원 문화의 토대 하에서 자라난 편향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업무나 문서의 내용에 관한 자율적인 결정권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형식과 외관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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