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로츠뎀 Apr 04. 2019

시(詩)는 '배신의 언어'로 쓰인다

브런치 무비 패스 2019_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보다


사라 콜란겔로 감독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공식 개봉 전에 브런치 무비 패스로 먼저 만나봤습니다. 영화의 원제는 '유치원 선생님'<The Kindergarten teacher>입니다만 배급사에서 이 제목 그대로 개봉할 엄두가 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바꾼 제목도 나쁘진 않지만 영화의 원래 초점은 '작은 시인'보다는 '티처'에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스라엘의 실력파 감독이라는 나다브 라피드의 영화 <시인 요아브>라고 합니다. 영화는 한국판 제목이 의도한 바와는 달리 뻔한 '영재 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아 무척 독창적이고 흥미롭습니다. 예술적 욕망과 재능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감독의 탄탄한 연출력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줍니다.    

다섯 살 천재시인 지미

영화 초반부는 어린 주인공의 천재적 재능을 다루는 '영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타고난 특별한 재능으로 일찌감치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그런 어린 주인공의 활약을 부러움 반, 놀라움 반으로 따라가야 하는 <어거스트 러쉬>나 <굿윌 헌팅> 같은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는 이런 '영재 영화'의 공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반전이 충격적인 엔딩에 숨어 있습니다. 주인공 리사(매기 질렌할)도 어린 천재 지미(파커 세박)를 이끌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성숙한 인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리사 자신도 자신의 욕망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고민하고 좌절하는 불안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지미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해준 리사

보통의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50대 초, 중반쯤 되어 보이는 유치원 선생님 리사는 안정된 일상이 주는 권태와 공허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써봅니다. 이미 다 커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남편과의 관계도 열정이 식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직장 생활도 별다른 긴장과 자극이 되지 못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리사가 유일한 위안으로 삼는 것은 시를 쓰고 낭독하는 문학강좌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예술적 재능이 없는 리사에게 이 시 쓰기 평생 교육 강좌도 일상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사는 자신이 일하는 유치원에서 다섯 살짜리 꼬마 천재 시인 지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문학강좌에서 지미의 시를 자신의 것처럼 발표하면서 리사는 강사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하고 이와 함께 리사의 삶에 생기와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꼬마 지미의 천재적인 예술적 재능에 감탄하고 놀라워하다가 결국엔 지미를 통해 리사는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대리 충족하기도 합니다.


 “시는 땅에서 살며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바다동물의 일기다”


리사는 자신의 존재감을 시라는 예술 양식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으나 자신은 갖지 못한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좌절해야 했고, 자신에게는 결핍된 천재성을 꼬마 지미에게서 발견하게 되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지미가 마치 주인공 리사의 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미의 가족이나 유모에 대한 리사의 불만이나 유치원 선생님을 넘어 예술적 후원인(메세나)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려는 리사의 태도에서 어쩌면 리사는 자신에게도 그런 관심이나 후원인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황소가 뒤뜰에 홀로 서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문을 열고 한 걸음 다가갔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스쳐 가고

소는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살기 위해 몰아쉬듯 계속 숨을 뱉었다

그런 소는 필요 없다 난 어린 소년이니...

그렇다고 말해 줘

어서 그렇다고 말해 주렴

-지미의 시 <황소>


갑자기 시가 떠올라 불현듯 읊조리지만 그것을 옮겨 적어 주는 리사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지미의 천재성은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듯이 어린 시절의 리사에게도 어쩌면 예술적 재능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사에겐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후원인도 없었고, 지미의 아빠가 말하듯이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훨씬 많은 수입을 가져다준다는 가족들의 경제논리에 자신의 재능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봐 주고, 그 예술적 재능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후원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리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지미의 예술적 재능에 애착을 보입니다.

관점의 '배신'에 능숙한 어린아이 지미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저에게 특별한 이유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지미는 다섯 살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예술적 감각으로 자신만의 시를 창조하지만 리사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학이든 미술이든, 어떤 예술 양식이든 예술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예술의 본질은 '배신'에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에서는 다루는 예술 양식인 시에 한정해서 말해본다면, 다섯 살 지미가 리사보다 더 훌륭한 예술적 재능을 보이는 것은 지미는 어떤 의미에서 '배신'에 자유롭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미는 어쩌면 리사의 분신

지미는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관점을 바꿉니다. 어린 소년이기도 하고 황소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벽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는 관점의 자유로운 이동 즉, 관점의 '배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술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현실을 가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정, 현실의 '배신'이 예술의 전제가 됩니다.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배신'하는 가상으로서의 현실, 이것이 예술이 성립하기 위한 기본 전제입니다. 그래서 예술(Art, Kunst)에는 인위적이고(artificial) 기술적인(technical) 요소가 기본적으로 첨가되어집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리사가 지미만큼 좋은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은 리사는 '배신'에 능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린아이들은 순간에 집착하지 않고 쉽게 망각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반복과 일치, 규칙과 질서의 세계인 일상에 얽매여 그 무기력한 일상을 쉽게 '배신'하지 못합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시적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의 배신, 관점의 배신에 다른 사람들보다 능수능란하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리사가 지미의 시를 감상하고 즐기기보다는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과 '집착'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것처럼 현실을 배신할 수 없는 일상에의 매몰이 예술적 재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이 욕실에 갇혀버린 리사와 경찰차에 갇혀버린 지미의 모습으로 끝나는 부분은 저에게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우리 내면의 목소리는 일상의 현실 속에서도 매 순간 우리에게 "시가 떠올랐어요"라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을 '배신'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에게 그 목소리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영화포스터


오락성: 

영상미: 

작품성: 

완성도: 

       



 #나의작은시인에게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니체가 본 영화 <알리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