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로츠뎀 Feb 11. 2019

니체가 본 영화 <알리타>

제임스 카메론제작, 로버트 로드리게즈감독, 로사 살라자르 주연의 알리타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말하지만, 경험은 반대로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때 정신이 적합한 사유를 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않는가?" 
                                                           _ <에티카>,  스피노자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일생의 기획이라는 <알리타>는 실제로는 카메론이 아니라 <신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알리타>는 모든 면에서 익숙하고 편하고 자연스러운 영화입니다.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미래사회, 쇠락한 지상의 삶과 완벽해 보이는 천상의 삶의 이분법적 대비가 그렇고, 인간과 구별이 모호해진 사이보그의 등장, 왜소화 된 인간적 삶이 음울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적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이에 더해 제임스 카메론 특유의 완벽에 가까운 CG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특수효과도 이젠 너무 익숙합니다. 고철 더미에서 신체 일부를 발견해 이도 박사가 부활시킨 주인공 '알리타'는 그 육체의 움직임과 감정표현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인간'이라고 부르고, 불리는 사실이 거북하지 않습니다. 

 

 

미래사회에서 인간과 비인간(사이 보그)의 구별은 모호해지고 그 모호함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 신체의 일부는 어려움 없이 기계적 부품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체의 일부를 기능이 강화된 소재와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계로 장착할 수 있으며 생리적 거부반응도 감정적 거부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알리타>의 경우도 그렇지만, 신체의 일부 중에서도 인간의 머리 부분만은 무엇인가 특수한 지위를 얻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사회에서 사이보그화 된 인간들이 대부분의 신체를  자연스럽게 기계부품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유독 머리 부분만은 인간 본래의 유기체적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리타>도 사실, 그 부분이 남아있어 '살아있음'을 확인받았고 새로운 '육체'를 달고 다시 재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정신은 신체 중 머리 부분에 깃들어 있으며, 정신이 육체를 통제한다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육신, 마음과 신체의 익숙한 이분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 부분만 남아있으면 나머지 몸 전부가 떨어져 나가도 새로운 몸을 얻어 소생할 수 있으며, 반대로 머리가 잘려나가면 전부를 잃게 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는 영화 속에서 머리만 남은 사이보그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정신과 신체,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과 정신과 영혼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인식은 사실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도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이해했으며, 영혼은 이성을 관장하며 완전하고 불멸하는 것이며 육체는 욕망과 충동을 낳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에서도 이상적이고 완벽한 철인은 인간의 머리 부분에 비유했으며 경제생산과 노동을 담당하는 노예는 신체의 사지에 비유됩니다. 언제는 영혼은 죽음을 넘어 살아남았고 육체는 먼지가 되어 흙으로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습니다. 


이런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은 데카르트에 와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에게서 정신과 육체는 완벽하게 분리되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었고 신체는 단지 껍질이나 기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육체를 완벽하게 분리하여 감각이 철저히 배제된 순수한 인식을 추구했던 데카르트에게 이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습니다. 사실 데카르트는 영혼 anima와 정신 mens를  구분했는데 애니메이션의 어원인 anima에는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활기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순수한 인식의 원천이지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는 mens가 정신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 생각했기에 영혼과 정신을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정신은 순수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신체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정신과 신체의 구분은 기독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성서에서 나와있듯이 영혼은 미천한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신의 숨결 같은 것이었고 몸은 신의 형상을 본떠 진흙으로 빚어진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죽어서도 살아남아 신의 나라로 들어갈 고귀한고 성스러운 부분이라면 육체는 더럽고 불결한 욕망과 충동을 만들어 내는 부분이었습니다. 육체에 대한 기독교적 원한과 비난은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에 와서 극단으로 치달아 신체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억압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육체가 만들어내는 성적 욕구를 참아내는 것이야 말로 그들에겐 성과 속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음란마귀와 성스러운 섹스의 대비? 이렇게 육체와 그 육체가 만들어 내는 욕망과 충동과 감정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과연 영혼은 성스러운 것이고 육체는 타락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영화 <알리타>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알리타가 이도 박사가 처음에 달아준 신체를 사고로 잃고 새로운 신체를 얻음으로써 전사(배틀 엔젤)로서의 자의식을 깨닫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이 만든 탁월한 신체를 얻음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이 알리타만이 구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무술을 가능하게 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Leib bin ich und Seele.  
Leib bin ich ganz und gar, und Nichts ausserdem;
und Seele ist nur ein Wort für ein Etwas am Leibe. 
Der Leib ist eine grosse Vernunft, eine Vielheit mit Einem Sinne, ein Krieg und ein Frieden, eine Heerde und ein Hirt. 

Werkzeug deines Leibes ist auch deine kleine Vernunft, mein Bruder, die du "Geist" nennst, ein kleines Werk- und Spielzeug deiner grossen Vernunft.  

"Ich" sagst du und bist stolz auf diess Wort.
Aber das Grössere ist, woran du nicht glauben willst, - dein Leib und seine grosse Vernunft: die sagt nicht Ich, aber thut Ich.
   
"나는 육체(Leib)이며 영혼(Seele)이다. 나는 오직 육체일뿐, 육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다만 육체의 내부에 속한 그 무엇을 나타내는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육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실체며,
전쟁인 동시에 평화이며, 양떼인 동시에 목자이다.

형제여, 그대들이 '정신'(Geist)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역시 그대들의 육체의 도구이다.
그대들의 커다란 이성은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들은 '자아'(Ich)라고 말하며 이 말에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그대들의 육체이며, 육체라는 커다란 이성이다. 이 커다란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한다."

- 니체,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통적인 서구 철학의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과 영혼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버린 최초의 철학자는 니체였습니다. 니체에게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육체가 그 필요에 따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Werk- und Spielzeuge sind Sinn und Geist: hinter ihnen liegt noch das Selbst.
Das Selbst sucht auch mit den Augen der Sinne, es horcht auch mit den Ohren des Geistes.     
Immer horcht das Selbst und sucht: es vergleicht, bezwingt, erobert, zerstört.
Es herrscht und ist auch des Ich's Beherrscher.   
Hinter deinen Gedanken und Gefühlen, mein Bruder, steht ein mächtiger Gebieter, ein unbekannter Weiser - der heisst Selbst.
In deinem Leibe wohnt er, dein Leib ist er.
Es ist mehr Vernunft in deinem Leibe, als in deiner besten Weisheit.
Und wer weiss denn, wozu dein Leib gerade deine beste Weisheit nöthig hat?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장난감일 뿐이다. 그들 뒤에는 역시 자기(Selbst)라는 것이 있다.
자기도 역시 감각의 눈으로 탐색하며 정신의 귀로 경청한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자아의 지배자도 그것이다.
형제여, 그대의 모든 사상과 생각과 느낌 뒤에는 '본래의 자기'라는 강력한 명령자며 낯선 현자가 있다. 그는 그대의 육체 속에 살고 있다. 그가 바로 그대의 육체인 것이다.
그대의 육체 속에는 그대의 최상의 지혜 속에서 보다 더 많은 이성이 있다.  
그 누가 이를 알 것인가! 무엇을 위해 도대체 그대의 육체가 그대의 최상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가를 "
_니체,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니체에게 '신체'는  단순히 육체(Leib)로서 영혼(Seele)이나 정신(Geist)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개념이며 이를 영혼(Seele)이나 자아(Ich)와 구별하여 '자기'(das Selbst)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어떤 행동의 원인으로 이야기하는 정신의 작용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이 자기가 발현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알리타가 전사의 꿈을 꾸고 전투의 기억을 떠올려 천상의 도시 <자렘>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정신의 명령이 아니라 바로 알리타의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전사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갖게 되는 자의식인 것입니다. 자아가 자신의 신체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자아를 지배한 결과가 전사로서의 삶인 것이며 전투 번호 99호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니체에게서 신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안정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과 투쟁, 생성과 창조의 상태입니다. 알리타가 장착한 전사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욕망들은 알리타의 정신과 육신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기어 나왔습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인식체계와 달리 우리의 몸은 정신과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 몸에는 사유하는 정신이 있고, 느끼는 감각이 있으며, 그런 것들을 추동하는 여러 힘들, 정서들(열정이나 욕망들:affectus)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체 안에는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생리적, 심리적, 정서적 준칙이 있으며 특정한 정서들이 우월한 상황이 되면 우리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생겨납니다. 알리타가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듯이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전사로서의 정체성은 알리타의 자아가 불러낸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알리타의 자아는 전사로서의 알리타의 신체가 자기의 행동과 실천을 펼친 후 형성된 자기에 대한 어떤 관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어린아이 속에 어머니가 있듯이 행위 속에 너희의 자기가 있다."


니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기독교 윤리관에서 사람의 행동을 그 주체의 행위 자체로 파악하지 않고 배후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려고 애쓴 이유는 '자유의지'를 지닌 그 주체의 심판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존재의 행동을 그 존재의 정신작용의 결과로, 그 배후에 있는 누군가의 의도로 파악하는 것은 범죄자의 행위를 평가할 때  그 배후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영화감독을 그의 작품으로 평가하지 않고 의도로 평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감독은 자신의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평가받아야지 어떤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는 '의도'를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바타>나 <알리타> 같은 걸작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는 영화감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동이나 실천과 분리된 채 그 배후에 존재하는 주체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실천을 볼 때 그 행동의 배후, 배후의 주체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표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육체에 대한 원한을 품고, 신체를 경멸하며,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윤리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고, 정신에 육체보다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고 육체의 행위 자체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평가하려 하지 않고 그 행위의 배후와 의도를 색출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인간을 신에게 영원히 구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신을 구속할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다면 신은 그 인간을 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창안된 것이다. 

자유의지의 창안은 인류가 신학자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술 중 가장 못돼먹은 기술이다."




<알리타>는 훌륭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 세련된 볼거리를 보다가 든 생각들이었습니다. 




오락성: 

영상미: 

작품성: 

완성도: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논픽션>에도 있고 브런치에도 있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