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기욤 까네 주연의 영화 <논-픽션>
요즘 브런치에 푹 빠진 나에게 영화 <논픽션>은 너무너무 흥미로왔다. <퍼스널 쇼퍼>로 널리 인정받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신작, 마리옹 꼬띠아르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기욤 까네와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이라니! 여기까지의 네임 밸류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뱅상 맥켄과 크리스타 테레까지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선택, 결과는 흡족. 이런 주제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영화로 만들고, 그 영화를 보는 프랑스인들이 놀랍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가벼운 사건과 소재 속에서 놓치기 쉬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주제가 내포하는 무게에 비해 영상은 경쾌하게 진행되어 지루할 틈이 없다. 나 말고도 많은 시네필들이 이미 극장을 다녀갔나 보다. 속속 리뷰가 올라온다. 이러다간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질까 봐 은근 걱정된다. 던지는 질문과 비교할 때 영화의 기본 줄기는 꽤 간결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엔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몇 가지 이항대립이 등장한다. 첫째, 전자 잭(e-Book)과 종이책의 대립. 둘째, 픽션과 논픽션의 대립, 셋째, 외도와 결혼 관계의 대립, 넷째, 정치인의 관리된 이미지와 실제 본성의 대립이다. 이 이항대립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지나간 것과 다가오는 것의 대립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보기엔 결국 실제와 가상의 대립이다. 우리 삶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다가오는 것의 자리에 속하는 것들은 출판문화 분야에서는 전자책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출판이고, 문학과 소설 분야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 이미 겪은 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논-픽션을 새로이 창조해내는 일이고, 부부관계에서는 비록 일탈이지만 신선한 자극과 존재감의 확인으로 다가오는 외도이며, 정치인의 본색에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새로 덧쓰워지는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와 대중들의 기대이다.
이 영화는 이들 이항대립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가 그 대립쌍을 구분 짓고 확인하고 정리하는데 그친다면 정말 영화는 참기 힘든 도식과 요약으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철학사에서도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익숙한 것이었다. 이른바 실재와 가상, 본질과 허구의 문제.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늘 찾아다녔던 그림자 뒤에 숨은 이데아, 동굴 속에 갇힌 채 이성의 빛,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인간! 계몽은 동굴의 우상에 빠져 이데아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이성의 빛으로 깨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니체에 의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 그 실재와 가상의 이분법. 아무리 등불을 들고 찾아보아도 표면 뒤에 숨은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답답함! 왜냐하면 니체 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는 진리는 표면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상적인 표면 속에 있는 것이기에. 표상으로 던져지는 세계 자체에.
전자책, 트위터, 블로그 댓글, 브런치와 같은 디지털 글쓰기와 디지털 출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에도 여전히 건재한 종이책의 위력과 줄어들지 않은 매출은 아날로그 출판에 대한 디지털 출판의 일방적 승리를 선언하기에 무언가 부족하다. '모든 픽션은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며 픽션 없이는 도무지 소설을 쓸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의 소설을 팩션(Faction)이라 칭하는 소설가 레오나르(뱅상 맥켄)와 그 소설 속에 형상화된 자신의 일탈을 확인하며 짜릿한 존재감을 맛보는 현실 속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를 보면 픽션의 힘을 부정할 수만도 없다. 대중 정치인들이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에 나서고 그렇게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정치의 권력 자원으로 다시 동원한다 해도 이를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게 사실 아닌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에 집요하게 혐오 발언을 퍼붓고 그 결과 얻어진 지지세력 결집을 보면 이 악순환의 구조가 확인된다.
디지털 글쓰기와 전자책은 분명 새롭게 다가오는 현상들이고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의 질서와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종이책의 매출이 증가했다'는 알랭(기욤 까네)의 말처럼 아날로그적 글쓰기가 완전히 사망한 것도 아니다. 전통적 글쓰기에는 디지털 글쓰기가 가질 수 없는,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촉감과 숨결이 있다. 브런치 글쓰기를 활동을 하며 많은 작가들이 종이책 출간을 열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 아닐까.
자신의 말처럼 '부부는 욕망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에' 스타 배우로 인정받는 세레나조차도 성공한 남편과 행복한 가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재구성하는 소설가와 외도에 빠지고 그 소설 속 배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영화 속 그녀는 실제의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셀레나를 연기하는 줄리엣 비노쉬조차도 실제의 비노쉬에게 다가갈 수 없고, 실제의 비노쉬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설정은 정말 대단하다.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실재인지의 경계는 무너지고 양자의 구분은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소설가 레오나르에겐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그렇게 모호하다. 지나간 삶의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고 타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소설은 타인과의 경험과 관계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것이기에 팩션(Faction)이라 칭한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도 역시 모호한 것이다.
가상과 실재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좌절하고 그렇게 흔들리며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 삶이다. 영화 속에서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레오나르에게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레오나르 사랑한다고 하는 발레리, 대중들에게는 완벽한 존재로 인정받지만 실제로는 문제 투성이인 정치인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발레리(노라 함자오위)의 삶도 계속된다. 영화가 레오나르와 발레리의 임신 사실을 알리며 끝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는 배경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우리 삶의 숙명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그래서 세레나도 다시는 자기 이야기를 소설 속에 쓰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외도의 끝을 통보하고, 출판사의 디지털 부분을 담당하는 알랭의 애인 로르(크리스타 테레)도 알랭의 가정을 파탄시키지 않고 스스로 이별을 선택한다. 그런 게 우리 삶이다. 불확실하고 모호해도 흔들리며 이어지는 것.
대중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길거리에서 성매매를 자행할 정도로 몰지각한 정치인인 발레리의 상관에서 보여지듯이 대중 매체가 전하는 이미지와 그 대상의 실제 본성에도 괴리와 간극이 놓여있다. 그러나 어떤 게 가상이고 어떤 게 본모습인지, 어떤 게 이미지이고 어떤 게 실재인지 우리는 쉽게 구분할 수 없다. 여기서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 상습 복용과 성폭력 동영상 유포 범죄 등 일탈행위가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 제목이 그냥 <논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인 데에 눈길이 간다. 굳이 하이픈(-)을 넣어 한 호흡을 추가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들이 단순히 픽션과 논픽션의 이분법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며, 픽션과 구분되기 힘든 논-픽션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가상과 실재의 경계, 이미지와 실체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니체적이다. 니체에게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구분하던 실체(실재)와 가상의 이분법이 무의미했으며, 니체에게 세상은 해석과 표상 그 자체로 던져진 것이었기에. 올리비에 아시야스 감독의 전작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가 니체의 주요 사유가 태어난 장소인 스위스 알프스의 질스마리아(Sils Maria)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읽어보시길!)
한때 원래 디지털의 세계의 의미를 주로 0과 1의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공간을 지칭하던 시절엔 영화에서도 디지털 공간과 아날로그 공간의 대립, 매트릭스의 시공간과 이성적 주체가 깨어난 시공간의 대비를 다루는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때에는 디지털 세계와 아날로그 세계의 대비가 선명하게 구분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트위터, 블로그, SNS, 브런치 글쓰기를 비롯한 디지털 환경에서의 다양한 글쓰기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지점이다. 특별한 등단 절차 없이 누구나 쉽게 작가가 되어(브런치는 간단한 사전 심사 단계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글을 쓰고 공감을 얻고 댓글을 통해 교감한다.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고 삭제, 복사, 전파가 무척 용이하다. 하지만 분명 단점 많다. 익명성의 뒤에 숨은 무자비한 댓글의 공격, '브런치는 페미에 장악되었다'는 둥 진영논리에 입각한 입장이 다른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글의 전반적 내용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날리는 댓글과 감상.
트위터, 댓글, 블로그 등 디지털 글쓰기에 있어서는 내용과 깊이보다는 제목과 키워드, 길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주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모바일 환경에서 글을 '읽는다'기 보다는 '보는 것'이기에 일단 눈에 띄어야 한다. 그래서 긴 글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글, 웹툰 등이 보기가 좋다. 서점에 나가보면 요즘 책들의 길이와 외관이 얼마나 디지털 환경에 영향을 받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브런치는 다가오는 디지털 방식의 글쓰기와 지나간 듯 보이는 아날로그적 방식의 글쓰기를 결합하려는 새로운 글쓰기 플랫폼이다. 내게 새로운 글쓰기 플랫폼으로서 브런치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경계를 구분하고 단정 짓지 않고, 디지털 공간의 독자와 현실 공간의 작가를 이어주고, 나아가 독자와 작가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호함의 시도가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상호작용(인터랙티브)의 모험이어서 좋다. 그래서일까, 점점 브런치 글쓰기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 <논-픽셕>을 보다 브런치에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