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로츠뎀 Apr 25. 2019

'살아있는' 진심이 말한다

노회찬 유고산문 <노회찬의 진심> : 2004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록

노회찬의 유고 산문집 <노회찬의 진심>을 읽습니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정치인 노회찬의 목소리, 그의 눈빛, 그의 마음입니다. 2018년 7월 23일. 그의 사망 소식에 아내와 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얼마간을 흐느껴야 했습니다. 안타까움과 먹먹함에, 뜨거운 분노와 당혹스러움에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가 어느 정당 소속 국회 의원인지와 상관없이,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언제나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 '진심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제 노회찬마저 없는 우리 정치를 상상하는 일은 너무나 화나고 싫은 일이었습니다.

노회찬의 진심

사실, 저는 예전에 정당인 노회찬을 직접 인터뷰한 일이 있었습니다. 2002년인가 2003년쯤인가로 기억하는데 당시 잠시 시사잡지 기자로 일하던 저는 '앞으로 주목받을 정치인'으로 유시민과 노회찬을 꼽았고 그들을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유시민 측 보좌관으로부터는 정중히 거절당했지만 노회찬 대표로부터는 흔쾌히 수락을 얻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고 그는 정말 성심성의 껏 저의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포부를 피력했습니다. 진심과 열정, 희망과 힘이 느껴지는 인터뷰였습니다. 안타깝게 그 인터뷰는 회사 사정으로 활자화되지 못했고 저는 퇴사했지만 그 원고는 아직도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 원고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저만 간직하고 있는 노회찬의 미공개 인터뷰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저와 노회찬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네요. 하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으로 묘한 일이어서, 제 아내는 그로부터 10 여년이 지난 2014년에 그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아내의 핸드폰엔 그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자유인 노회찬

<노회찬의 진심>을 읽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느낄수 있습니다. 촌철살인의 비유와 풍자를 통해 낡은 정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를 꿈꿨던 그의 마음이 그대로 살아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하며 그가 당원게시판,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 올린 그의 글 속에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고민하는 노회찬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권력자들, 부패한 강자들의 오만과 위선에 가하는 그의 실랄한 비판도 함께 서려있습니다.


"길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가 남기는 발자국이 길을 만들 것이다."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인해 정치활동을 위한 자금이 부족하다며 후원금 모금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국회의원들을 비판하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입만 열면 서민경제가 어렵다느니, 민생이 위기상태라느니 말하는 바로 그 입으로 정치자금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면 먼저 3000cc, 4000cc 하는 검은 세단부터 팔아서 정치자금으로 써야 한다. 골프도 끊겠다고 선언하고 한 끼 4만 원, 5만 원 하는 저녁식사도 1만 원 이하짜리로 돌려야 한다, 해외출장 갈 때 이코노미석으로 갈 테니 천만 원에 가까운 퍼스트 클래스 좌석 비용을 정책활동비로 돌려달라고 스스로 선언해야 한다."  


또한 공무원 노조의 합법화에 반대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한국이 공무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여 OECD에서 이 나라를 특별 감시국으로 지정한 지 수년째인데도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정부가 앞장서서 공무원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광분할 때 열린우리당  386 출신 중에서 '그래선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한  의원 한 사람 없었다."


문화인 노회찬

이렇게 노회찬은 불의와 부정에는 누구보다 엄정하고 단호했지만 매일매일 정직하게 일하고 이름 없이 살아가는 많은 서민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따스하고 '젠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휴게실이 없는 국회 청소 용역 노동자들에게 '일이 잘 안되면 우리 사무실을 같이 쓰자'라고 제안하는 국회의원. 자신의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며 "왜 이렇게 머리가 벗겨지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꼬마에게는 괜찮다고 웃어주는 국회의원. 3000명가량의 일반인들이 3대의 엘리베이터를 사용해야 할 때 299명의 의원만을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 3대가  웬 말이냐며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폐지시킨 정치인. 노회찬의 온화한 성품은 늘 여성, 비정규노동자, 파견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환경미화원 등 사회적 약자의 마음에 닿아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내와의 결혼이다."


장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자신의 조카에게 노회찬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당장 알 수 없을 때에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라.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처럼 노회찬 자신도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길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가 남기는 발자국이 길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하며 말입니다. 도대체 그 용기와 그 정의감과 그 단호함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노회찬은 1956년 8월 31일 부산 초량에서 태어났습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부모님 덕분에 그도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배려 덕분에 그는 스스로 첼로도 연주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어렵고 고단한 길을 걸으면서도 인간적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화적 소양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3년 경기고 재학 시절이었습니다. 유신 선포 1주년을 맞아 그는 이종걸 의원과 함께 유신반대 유인물을 뿌리며 학생운동을 했고, 삼수 끝에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것도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른바 잘나가는 명문대를 졸업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대기업에 취직해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노회찬은 1982년 대학 재학 중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며 '가장 힘들고 어려운 노동운동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 이후에도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의 경력을 밑천으로 기성 보수 정치권의 꽃길이 아니라 진보정당, 진보정치라는 전대미문의 가시밭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그는 늘 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등 이름 없고 소외된 약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정한 엄중한 도덕적 잣대에 눌려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불의와 타협하고 편하게 권력에 영합하는 사람들에겐 노회찬의 삶을 이해하기란 불가사의한 일이겠습니다만, 그가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연설에게 밝혔듯이,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미화원 아주머니들처럼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한 채 함께 살아가는" 많은 서민들, 보통의 존재들에게 노회찬의 삶과 노회찬의 진심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를 즐겁게 했던 그의 촌철살인과, 한동안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 그의 육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2019년 4월 3일 '창원의 기적'에서 느껴지듯이 노회찬의 진심, 노회찬의 소망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노회찬의 진심> ; 노회찬 유고 산문 2004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록을 읽으며 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책 속에서 만난 인상 깊은 그의 어록을 옮겨적어 봅니다.

 

“법 앞에 만인이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2013년 2월 14일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인하여 국회를 떠나며,


“옆에서 굶고 있는데 암소 갈비 뜯어도 됩니까? 암소 갈비 뜯는 사람들 불고기 먹어라 이거예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 라면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 2004년 부유세 도입을 주장하며,


"50년 된 삼겹살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 2004. 3. 20.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TV토론회에서,


"국가경제를 위해 30년 동안 노동자로 일해왔기에 형을 감경한다, 이런 판결 내려진 적 있습니까?"

- 2015년 5월 정치인 경제인 특별사면을 비판하며,


"현행 선거법으로 트위터를 단속하는 것은 우주선을 발명해 놓고 도로교통법을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입니다."

- 2010. 2. 16. <한겨레신문>인터뷰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트위터를 단속하기로 한 것을 비판하며,


"그의 아버지는 투표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 2012. 10. 31.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투표시간 연장에 반대의견을 나타내자 이를 비판하며,


"제게 촌철살인을 요구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사실 살인업계 떠난 지 꽤 됩니다. 나이가 드니까 살생을 멀리하게 되더군요."

- 2009. 9. 21. 트위터에서,


"현재 시점으로 보면 제가 객관적으로 한 표 앞서고 있다."

- 2014. 7. 서울 동작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자유인, 평화인, 문화인 노회찬, 당신과 잠시 같은 시대를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평화인 노회찬


매거진의 이전글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개인주의자 선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