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의 월령대에 따라 집에 들이는 대형 장난감들이 있는데 엄마아빠의 취향에 따라 생략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미끄럼틀을 들이는 대신 주방놀이를 생략했는데 활동적인 아가가 밖에 나가지 않고도 충분히 에너지를 분출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최적의 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뜩이나 말을 안 하고 대근육 발달은 빠른 우리 아가에게는 미끄럼틀보다는 주방놀이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때의 결심은 판단미스였던 것 같다.
아가가 32개월정도 되었을 때 우리집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집을 나서 놀이터까지 가는 길이 언덕길이라 놀이터는 절대 혼자 가지 않았던 과거의 집과 달리 이번 집은 놀이터와 어린이집 등이 있는 지상에 차가 없는 단지라 미끄럼틀은 필요가 없었던데다가 마침 필요로 하는 친구가 있어 나눔을 하고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학구열에 불타는 아가로 만들고자 거실 한 켠에 책장을 두고 전집을 꽂았는데 아가가 갖고 놀만한 장난감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다시 검색에 돌입했다.
엄마가 언어치료에 푹 빠져 열심히 연구하고 있던 시기라 어떤 장난감을 들이면 더 도움이 될 지 찾아보던 중 '역할놀이가 언어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구절에 꽂혀 역할놀이 장난감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32개월 발달에는 다소 늦은감이 있는 주방놀이를 들일것인지, 병원놀이를 들일 것인지 고민하다가 둘째도 좋아할 것 같아 주방놀이를 들였는데 이것저것 따지기 귀찮아져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민주방놀이'가 아닌 가성비 좋아보이는 것으로 구입했다. 우리 아가는 내 생각보다 훨씬 주방놀이를 좋아했는데 옆에서 함께 놀아주고 역할을 부여하니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주방놀이 장난감의 장점은 '칼, 도마, 숟가락, 젓가락, 오븐, 프라이팬, 접시, 그릇'과 같은 주방 식기들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엄마 오븐에 빵 구워주세요','정말 맛있다. 달콤한 딸기잼 발라주세요'와 같은 단어를 쓰며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말들을 재미있게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가는 처음에 이 활동을 할 때에는 과묵한 요리사가 되어 조용히 과일을 썰고 오븐에 머핀을 굽고 접시에 담아 엄마에게 주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그러한 모습에 게의치 않고 그때그때마다 엄마의 왕수다를 내보이니 아가도 짧은 문장은 따라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라고 말하면서 주던 것이 '먹어'나 '마셔'로 발전하고,'맛있겠다'나 '정말 맛있다'와 같은 말로 확장되어 갔다.
사실 나는 좀 특이한 부분에 집착하는 성격인데 내가 주방놀이를 사지 않았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반으로 싹뚝 잘라진 과일들이 거실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꼴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가를 위해 뒤늦게 주방놀이를 들였으면 감내해야 하는 일이지만 처음 몇 주동안은 이 구역의 집착왕이 되어 아가가 과일을싹뚝 자르면 금세 짝을 맞춰서 붙여 놓고 한 곳에 모아두곤 했다. 그런데 아가의 요리 열정이 커지면서, 그리고 둘째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며 엄마의 열정과 체력은 줄어들어 과일들이 비록 짝을 잃었지만 통 속에 들어가있는것만도 다행인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역시 아가와의 언어 놀이에 교묘하게 이용해 먹곤 했는데
'엄마 레몬이 먹고 싶어요. 그런데 레몬이 반쪽밖에 없어요. 어디있을까요? 찾아 주세요'와 같은 말을 하며 아가가 찾아서 집어오게도 하고 '붙여~붙여'라는 말을 외치며 뿔뿔이 흩어진 과일들의 짝을 맞추어 붙이는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창 잘 갖고 놀던 주방놀이 과일들은 또다시 장난감 수납함에서 수면중이지만 주방놀이 본체는 아직도 요긴하게 이용되고 있다. 우리 아가가 오븐에 푹 빠졌는지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오면 오븐 안에 숨겨 넣곤 했는데 '꿈이야, 자동차가 오븐 안에 갇혀서 너무 뜨겁대'라든지 '자동차가 오븐 속에 숨었어'라든지 왠지 오늘 가르쳐주고 싶은 단어들을 활용하여 아가에게 말을 걸어주기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엄마~해봐'라는 말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우리 꿈이에게 필요한 건 리얼한 상황설정이었던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역할놀이 장난감마저 없다면 아가에게 해줄 얘기가 더는 떠오르지 않아 기나긴 침묵 속에 아가를 키우고 있을테니 역할놀이 장난감은 육아에, 말 느린 아가에 단연 필수템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주방놀이가 아니었어도, 병원놀이나 마트놀이었어도 아가는 흥미를 갖고 활동했겠지만 내가 가장 잘 알고 친숙한 아이템을 활용하여 역할놀이를 해 보는게 맞는 것 같다. 병원이나 마트는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아무래도 대사가 한정적일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