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피가 머머져떠여

by 행복한꿈

동생이 태어난 후 우리 가족은 한동안 안방에서 함께 모여 잤는데 서로를 위해 잠자리 분리를 시도했다. 잠귀가 예민한 세 모자와 잠귀가 어두운 한 남자. 잠귀가 어두운 한 남자가 코를 골면 잠귀 밝은 가장 어린 남자가 잠이 깨서 울고 겨우 수습하고 나면 잠귀 밝은 두번째 어린남자가 깨서 돌아다닌다. 그 쯤 잠귀 어두운 남자가 잠깐 깨어나고 상황이 수습될 무렵 잠귀 밝은 가장 어린 남자가 분유를 찾으며 운다. 아예 깨지 않아도 약 6개월간 온가족이 선잠을 잤다. 두 아가가 모두 어려서 혼자 재우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모두가 함께 잤는데 이제 둘째도 아기침대를 졸업할 날이 왔고 그렇다면 어차피 침대를 하나 더 구입해야 할 것 같아 첫째가 쓰던 저상형 침대를 둘째에게 주고 첫째 방에 침대를 새로 마련해 주었다.

3년간 엄마아빠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잤는데 한순간에 혼자 자게 된 우리 아가의 모습이 짠하여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고자 조명이 달린 침대로 구입하고 아가가 좋아하는 동물 모양의 침구를 깔아 주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아가가 책을 안 좋아하는데 이를 어쩌지.


아가 수준에 맞게, 조금 쉬운감이 있는 똘망똘망과 곰곰이정도의 전집만 들였었는데 이것도 몇 번 읽고 나니 시들해졌는지 잘 읽지 않아서 급히 검색을 해 보기 시작했다. 전집들의 향연속에 아가들이 추피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끊기 어려웠다는 일화를 발견하고 당장 주문. 새 침대에서의 첫날밤에 둘이 함께 누워 읽혀 보았다.

추피 책의 매력은 아가가 생활 속에서 경험할만한 소소한 사건들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는 것과 그림이 많아 이야깃거리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책 표지를 넘기고 나면 두페이지에 걸쳐 추피시리즈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그려져있는데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야기한 후 책을 읽혀주다보니 그 부분을 그냥 지나치는 날은 아가가 다시 그 페이지를 펼쳐 뭐라고 웅얼웅얼거린다 싶더니 이제 제법 유창하게 엄마에게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 그림들 중에는 추피가 스키를 타는 장면, 추피가 넘어진 장면, 우는 장면 등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처음에는 아가가 '머머져떠여'라고 말을 하여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림들을 빠르게 스캔하여 아가가 언급한 그림이 추피가 넘어진 장면인 것을 알고 '추피가 넘어졌어요. 빠르게 달려가다가 쿵 하고 넘어졌어요.'라고 말해주니 아가가 너무 좋아했다. 추피책을 들이고 이 활동을 한 지 4개월정도 흐른 지금, 아가는 자고싶다는 의사 표현을 '추피 많이 읽어'라고 하고 몇십권이나 되는 책을 낑낑거리며 침대 위에 올려놓고 엄마를 기다리기도 하고 엄마가 피곤해서 그만 읽으려고 하면 그림을 보며 쫑알쫑알 열심히 책을 읽는 척을 하기도 한다. 가끔씩 추피 책을 침대방 밖으로 꺼내와 벌써 몇 권의 추피책은 동생에게 희생되고 말았지만 추피책은 우리 아가의 어휘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추피가 넘어진 사건을 생활 속에서도 적용해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이가 머머졌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발음도 제법 잘 하고 추피가 반창고를 붙이거나 약을 바라는 것을 몇 번 보더니 자꾸만 자기가 다쳤다며 약을 발라달라고 하기도 한다. 추피 시리즈에서 나온 삐에로가 인상적이었는지 삐에로 그림을 발견하면 '추피가 삐에로 분장을 해요'라고 말하고 추피와 필루, 랄루의 투닥거리는 일상을 보며 어린이집 친구들 이름을 대 보기도 한다.


불안과 걱정이 많은 엄마 덕분에 4살이 되도록 해수욕장도 안 가보고 모래놀이도 못해보고 스키장도 눈썰매장도 못가본 우리 아가는 추피를 읽으며 스키도 알고 해수욕장도 알고 배도 알고 선장도 알게 되었다. 지인들과 아가의 말이 느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우리 아가의 성향을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을 많이 하게 해야 해!'라고 말하곤 한다. 일반 아동들도 공통적으로 적용되긴 하지만 우리 아가는 자조성이 너무나 강하여 말할 필요를 잘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데 집, 어린이집만 왔다갔다하는 일상 속에서 어휘량을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함께 물놀이도 하고 눈싸움도 했다면 아가가 당연히 알고 있을 이 단어들을 아가가 추피를 읽고서야 더 정확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왠지 엄마의 조심성 덕분에 아가를 망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올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과 날카로운 모래알(세균에 대한 걱정?), 차가운 해수욕장(장염에 대한 걱정?)에 대한 걱정을 집어던지고 어디든 나가서 마음껏 뛰어놀고 넘어지고 울어보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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