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을 보여주는 나쁜 엄마

by 행복한꿈

꿈이를 낳은 후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육아는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꿈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아니, 잘 키울 자신이 있었다. 3.46kg의 아기를 12시간의 진통끝에 낳았을 때만 해도 내 육아가 이렇게 산으로 갈 줄은 몰랐다. 우리 아가가 먹는데에는 취미가 없어서 젖을 안 빨아줄지도 몰랐고 먹는것만 보면 기겁을 할지도 몰랐다. 여유시간이 생기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즐기는 이런 엄마 밑에서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는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읽은 육아서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난감은 엄마'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꽂힌 나머지 각종 육아템들을 거의 구입하지 않았고 '사운드북의 인위적인 소리는 아가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또 어디선가 주워들어서 동물 가면을 쓰고 '음메~음메~, 삐약삐약~'하며 하루종일 동물 소리를 내고 다녔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괜히 병균 옮아올까 싶어 주1회 가는 문화센터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고 문화센터에서도 아가가 기어다니다 만진 무언가에 각종 균이 있을까 싶어 1시간 내내 한 발 앞서 물티슈로 바닥이며 교구를 닦아대고 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아가는 엄마와의 상호작용에 취미가 없고 돌무렵 장염에 걸려 안먹는데 더 안먹는 아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만의 규칙 속에 사로잡힌 2년간의 육아 끝에 나는 봉인해제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아가는 또래보다 신체적으로도 인지적으로도 뛰어나지 않다. 그냥 엄마만 불행해지는 육아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탈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나와 단둘이 있는 아가에게 언어인풋이라고는 엄마의 음성이 다였는데 그 양과 질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생각에 아가들에게 핫한 캐릭터 만화를 틀어주었다. 이것이 우리 아가의 첫 영상은 아니다. 복직 후 우리 아가는 8시 30분부터 5시까지 어린이집에 맡겨졌는데 이 어린이집은 3시부터 5시까지 통합보육을 했다. 통합보육이라 함은 각자의 연령대끼리 모여 지내던 낮시간의 일과가 아닌, 남아있는 아가들이 연령에 상관없이 한 공간에 모여 생활하는 시간이다. 이 어린이집의 통합보육은 주로 영상노출이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어린이집을 당장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휴직을 할 상황도 아니어서 마음을 비우게 되었다. 아가는 집에서 영상을 보지 않아도 캐릭터 이름을 줄줄 외었고 병원에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비타민을 주면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바꾸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상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만화 영상 뿐만 아니라 어른들 드라마, 뉴스 보는 것도 꽤나 조심했다)은 나만의 육아 고집이었는데 우연히 만화를 하도 보여줘서 주인공 대사를 외우다 말이 늘었다는 친구 아가의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며 10분, 20분 보여주던게 이제는 1시간, 2시간이 되었다.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아가에게는 정말 큰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의성어, 의태어만 따라하는가 싶더니 몇 번 반복해서 본 영상에서 '아니','그래'와 같은 간단한 대사를 먼저 말하기도 하고 특정 영상을 틀어달라 말하며 자발화를 시작했다. 물을 먹기 위해서는 정수기 앞에만 있으면 되지만 예컨데 '똑똑박사 에디'를 보기 위해서는 티비 앞에 서있는다고 틀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가는 '똑똑한 에디'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임신중이라 영상을 보며 함께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루종일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아가 뒤통수에 대고 이런 저런 인풋을 제공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조금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니 왠지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아가가 영영 입을 열지 않을 것만 같아 태교도 할 겸 도서관에서 '언어치료'관련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지만 영상의 필요성을 인정해주는 서적도 있었다. 내가 듣고싶은 것만 듣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 아가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삶이 너무 버거운데 이런 저런 이야기에 흔들리며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영상이면 좀 어때? 엄마와 아가가 행복하며, 말만 잘 늘면 그만이지. 24시간 혼자 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시간동안 엄마와 함께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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