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넘어선 순간 마주하는 자유의 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나누고 구분하려 하며, 그 안에 자신을 속하게 하려 한다. 이는 단순한 사회의 장치가 아닌, 인간이 가진 오래된 본능이기도 하다. 학교의 '학번', 회사의 '부서', 각 세대별로 '세대 구분'을 짓기도 하고, 내가 가진 습성이나 성향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혈액형', 요즘에는 'MBTI'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함과 동시에 그 카테고리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여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왜 사람들은 어떻게든 카테고리를 나누고, 그 그룹 안에 자신이 속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 기원은 어쩌면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무리에 속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무리에 섞여 있을 때 덜 외롭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작은 안도감을 얻는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이로써 카테고리는 그 위안의 기초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괴리를 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카테고리는 마치 색깔 라벨처럼 나의 위에 달라붙어 버린다. 라벨은 이해를 쉽게 돕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단순화시켜 버린다. 라벨이 주는 안전함에 기댈수록, 내가 가진 고유한 결은 희미해지고 만다. "나는 A형이어서 소심한 성격이야.", "나는 T니까 피도 눈물도 없어.", "그 세대는 구태의연한 생각밖에는 하지 못해." 이러한 단정 속에서 한 사람의 색채는 희미해지고, 단순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카테고리는 한 사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서 고요히 빛나는 수많은 결을 지워버린다. 이해의 다리가 되기도 하지만, 오해의 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각각의 고운 빛깔을 내는 유리를,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모두 갈아치워 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리라.
어릴 적 학교에서 했던 운동회를 떠올려보자. 반 대항 경기를 거듭하며 우리는 '청군'과 '백군' 내지는 '1반'과 '2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로 묶였었다. 각 팀 간의 응원과 경쟁이 즐거움을 배가시키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나의 팀, 내가 속한 그 카테고리가 영원하지 않으며, 나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체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 '카테고리' 없이 살아가야 하는 순간과 마주한다. 살아가며 학번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순간, 직함이 떨어져 나간 자리, 혹은 가족이나 집단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왔을 때. 그때 남는 것은 결국 '나'라는 이름 하나뿐이다. 그 순간 일말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깊은 자유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리에 속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무리의 편리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유지하는 힘을 가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리 속에 서 있으면서도 무리에 흡수되지 않는 것, 함께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생각을 지속하는 것,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였을 때 스스로 사고하고 움직일 줄 아는 것, 그것이 '혼자'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나의 성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구분과 집단, '카테고리'라는 안락한 울타리를 넘어, '나라는 존재의 고유함'으로 바로서는 순간. 그때 비로소 나는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들이 가진 결을 함부로 단순화하지 않게 된다.
성숙과 성장은 이러한 외로움과 자유 사이의 가느다란 줄 위를 걷는 일이다. 무리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놓치지 않는, 분류와 구분의 세계 속에서 끝내 혼자로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비로소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고, 더 따뜻하게 타인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