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_ 이제 조금은 더 가벼운 방향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다음 장면

by Evanesce

Renewal [ rɪnuːəl ]

1. 재개, 부활

2. 갱신, 연장

3. 재개발, 회복; 개선


어떠한 변화는 떠나는 순간보다는 떠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또렷해진다. 익숙했던 풍경을 뒤로하고 낯선 곳에 서 있는 지금, 마음속에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의외로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에 가깝다. 오래도록 머물렀던 장소를 떠난다는 사실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쌓여 있던 낡은 공기와 기억들이 함께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닫혀 있는 창을 열었을 때처럼, 새로운 바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다.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에는 많은 장면들이 쌓여 있다. 같은 거리를 걸으며 지나온 계절들이 있고, 특별하지 않은 하루들이 반복되며 만들어 낸 생활의 결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던 순간들도 물론 함께 뒤섞여 있다. 쉽게 풀리지 않던 관계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마음을 지치게 했던 여러 장면들.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오래 쌓여 있던 것들은 어느 순간부터 편안함보다는 짊어져야 했던 무게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떠나는 그 순간, 묘하게 숨이 조금 깊어지는 느낌이 든다. 마치 오래 들고 있던 짐을 조용히 내려놓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익숙했던 그 풍경이 멀어질수록 그 안에 담겨 있던 갈등과 피로도 함께 뒤로 물러난다. 그 시간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금의 하루를 붙잡고 있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한 장의 계절처럼 접혀 마음 어딘가에 놓인다.


낯선 곳에서는 가장 먼저 공기의 결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익숙했던 거리의 소리 대신 새로운 무언가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처음 보는 하늘 아래에서의 하루의 속도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잠시 빌려온 시간처럼 느껴지지만, 그 낯섦 속에는 묘하게도 여백이 있다. 아직 아무것도 쌓이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그 여백.


그 여백은 마음에도 작은 변화를 만든다. 이전의 시간 속에서 풀지 못했던 생각들이 천천히 정리되고,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감정들에도 조금씩 자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공간에서 바라봄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게 새로움은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는 순간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의 변화는 하나의 전환에 가깝다. 지난 시간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 기억들이 지금의 발걸음을 붙잡지 않도록 조용히 내려놓는 일.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기대들, 아직 만나지 않은 장면들, 그리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아직 이곳에서의 하루들은 조용하기만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다른 방향이 흐르고 있다. 이전의 것들을 천천히 내려놓고, 앞으로의 시간을 조금 더 가볍게 바라보게 되는 마음. 누군가의 관계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아직 무엇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 한편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자라날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삶은 사실 늘 이렇게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어떤 장소에서의 시간이 충분히 쌓이면, 또 다른 공간에서의 다른 장면들이 시작된다.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위에 새로운 계절이 겹쳐진다.


지금 이 낯섦에서 맞이하는 하루는 아직 조용하지만, 분명 다른 빛을 품고 있다. 뒤로 남겨 둔 시간들이 한 장의 이야기처럼 접혀 마음 어딘가에 놓여 있는 동안, 앞으로의 날들은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처럼 펼쳐진다. 그 위에 어떤 장면들이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려 한다. 이전의 무게를 벗어 두고,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시작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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