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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19. 2022

<우리는 왜 어떤 작품을 '좋다'고 느낄까>  

#0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분석할 당위에서 부터

예술은 쾌락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있는것처럼 여겨지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 그 둘 사이에는 인과관계도 상관관계도 없다. 쾌락은 예술의 필요조건이 아니고, 예술또한 쾌락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예술의 형식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현대예술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관조활동으로 이데올로기적, 실용적 목적의 실천활동과 구분된다. 나치의 선전영화나 정치 포스터는 그에 따르면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다. 또, 예술은 논리적 인식도 아니기 때문에 개념적 진리를 전달하는 상징, 알레고리, 전형도 예술과는 무관하다. 즉, 우리가 아는 많은 중세의 예술들, 이를테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같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 또한 예술은 감각도 아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모방론이나 감각적 쾌락주의 역시 예술이 아니다. 

                     <Throughgoing line>, 칸딘스키, 1923 - 현대예술적 시대정신의 단적인 예와 같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에는 본질이나 목적이 있나?


현대예술은 다원주의에 그 근간을 둔다. 하지만 예술가 각각은 예술이나 작품에 대한 의도를 작품을 통해 표현한다. 이는 주관적 객관주의를 시사한다. 모든 예술을 아우르는 보편적 본질이나 목적성, 방법론을 밝히려는 시도는 더이상 무가치하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자기 이해 이후 예술가들은, 주관적 신념을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한다. 예술가들 각각이 믿는 자기 나름의 객관적 신념은, 주관적 예술관이 폭넓게 바탕되는 가운데 가능해진다. 즉, 수용자로서 우리는 예술품을 다원주의적 시각 하에 바라보아야 하고, 예술가로서 우리는 예술품을 절대주의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아서 단토 (Arthur Danto, 1924~2013)는 팝아트 이후, '나는 가지고 있지만 다른 예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제공하는 모더니즘의 역사는 끝나고, 예술작품의 규정된 방식이 부정된 이후 예술의 내러티브는 종말에 닿았다고 말한다. 


예술에 절대성이 없다면 우리는 수용자로써 왜 예술작품을 보는가? 


예술에 절대성이 있다면 혹은, 하나의 목적이나 당위가 있다면 우리는 수용자로써 예술작품을 봐야할 목적이나 당위가 생긴다. 신으로 부터 부여받은 삶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기 위해, 삶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등등. 

하지만 예술에 절대성이 없다면? 예술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예술의 수용은 여느 다른 놀이와 같은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행동반응을 야기하는 조건, 쾌락추구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한다. 쾌락이 없다면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감상자의 부재가 해당 작품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은 아닐지라도(아무도 보지 않는 작품도 가치를 지닐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감상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비록 우리들 사이에 인식론적 층위 즉, 심미안의 레벨차이가 조금 있어서 나같은 문외한은 현대미술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술작품을 각자의 쾌의 원리에 따라 감상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쾌와 예술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독립된 두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만의 고유하고 특정한 영역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쾌를 느낄 수 있는것은 아니다. 많은 예술들이 쾌를 유발하는 일련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특정 예술작품에서 쾌를 느낄 뿐이다. 즉, 분명히 말하지만 당연히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작품이 예술적 가치가 없는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쾌락과 예술작품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예술작품을 볼때 발생하는 쾌락의 이유를 해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분명히 예술에 단토가 말하는 거대한 내러티브가 있던 시기에는, 예술안에 내포되어 있는 쾌락의 속성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저것을 보고 좋다고 느끼는가?' 하는 질문은 '저 예술작품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 내의 거대서사가 사라진 이후, 예술작품에서 쾌락 유발의 근거를 찾는 것은, 해당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를 찾는 것이나 형식적으로 예술가의 작품관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예술은 하나가 아닌 여러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분석적 측면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내러티브가 사라진 오늘날 예술에게 가장 중요한 속성이 쾌를 유발하는 속성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대중문화만이 진짜 예술이라고 여겨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더니즘적 서사로의 복귀를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다만 보편적인 미와 예술이 관념이 사라진 시점에, 예술의 목적이나 방향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예술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일방향성을 견디지 못하고 역법체계를 만들거나 공간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고 원근법을 통해 평면위에 세상을 묘사하려 했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시도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구체적인 작품들, 특히 나 스스로가 나의 지평 안에서 후설될 감정을 느꼈던 작품들을 예로 들어가며, 그 작품에서 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이 기쁨, 쾌락, 즐거움, 감동 등으로 대변되는 '좋음'의 감정을 왜 느끼는지 정리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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