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rrie Levine에서 부터
1980년대 초 많은 여성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창조성이 재능에 기반했을 뿐 아니라 특권에도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그 작가들 중 많은 수(가령 ‘셰리 르빈’, ‘신디 셔먼’, ‘메리 캘리’) 가 자신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했다. 스타니스 제프스키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근대 서구 회화에의 주요한 전통인 누드화에서 진정한 주역은 그림 앞에 서 있는 남성 감상자다 ~ 여성은 ~ 스스로의 욕망을 노출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남녀간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에 대한 관계도 결정한다. 여성의 의식에 자리 잡은 내부 관찰자는 남성이며, 여성의 응시 대상으로서 스펙터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자아를 관찰자, 피관찰자 두 가지로 분류시켜 항상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동시에 주시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
한편 실존주의적 시선을 비롯한 모든 관계 맺는 방식에서 대자가 즉자로 물화된다는 사실은 보편적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이다. 이를 여성만의 특징으로 제한하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을 예술작품에서 드러나는 방식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즉, 자아를 관찰자와 피관찰자로 나누고, 보여지는 자기 자신을 주시하며, 그 이미지에 영향 받는다는 사실은 보편적 인간에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다만 이 주장은 예술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로, 그리고 그 현상의 결과로 인해 해당 현상이 더욱 심화될수 있음을 지적하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남성 예술가가 다수를 차지하던 역사적, 사회구조적인 배경 아래에서, 예술작품의 영역에서는 여성을 물화시키는 작업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현상에 대해서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현상에 대한 가치판단에는 특정한 목적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가뭄이라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가 전제되어야 하듯이). 즉, 위 현상이 지적하는 ‘대상화’는 인간의 실존적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이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여성을 물화시키는 경향성이 강했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이는 대상을 즉자화 시키는 대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포함 하는데, 이는 현존재적인 모든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시사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역사 속에서 많은 예술작품이 여성과 남성 중 여성을 물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실은 분명하며, 이는 80년대 초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하는데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대도시에의 삶에 결코 참여할 일 없을것으로 여겨지던 여자 테레자가 바람기 많은 연인 토마시에 의해 둘 사이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여성으로서의 지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후 테레자는 프라하의 봄 당시 사진작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주장과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매체로 사진을 선택한 이유가 사진이 회화에서 남성들이 차지하는 절대적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시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두 대자는 스스로 즉자화되는 경험을 하는 반면,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인간은 늘 대자의 지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대자의 상을 물질화하고 복제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하에 내보일 수 있다는 잠재력 덕분에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대자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 즉 스타니스제프스키의 분석처럼 많은 예술작품에서 물화되던 여성들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여러(특히 그녀에 따르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대자의 위치를 손쉽게 점유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