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가 만드는 세계>
글렌리벳 12y / 싱글몰트
40.0 % /700ml
프레쉬함 / 꽃 / 약한 바닐라 / 가벼운 과일향 / 사과 / 생강에서 오는 스파이시함
글렌리벳은 처음으로 합법 면허를 취득한 술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가짜 글렌리벳들이 차용한 글렌리벳이라는 일반명사 앞에 정관사 'The'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글렌리벳이 된 술이기도 하고, 조지4세가 반한 이른바'왕의 술'이기도 합니다. 스페이사이드를 대표하는, 사실 싱글몰트를 대표하는 3가지 술중 하나에 속하기도 한답니다.
술의 객관적인 정보는 나무위키에도 다 나와있기 때문에 그걸 여기에 나열하는것은 큰 의미가 없겠지요. 해서 술에 대한 감상과, 그 술이 만드는 세계에 대해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술을 마실때는 하나의 세계가 떠오릅니다. 사실 그건 새로운 세계보다는 이미 경험한 세계의 조합일 겁니다. 일종의 재인식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네요. 제가 살면서 느낀 무수히 많은 감각들이, 그만큼이나 많은 인상을 제 안에 남겨두었고, 술을 마시면 그 향과 맛의 감각들이 불러 일으키는 인상들이 조합되어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바로 영화처럼요!
더 글렌리벳 12년을 처음 맛보면, 가장 처음 받는 인상은 가볍다는 겁니다. 풍부한 맛과 반대되는 가벼움이랄까요. 길리안 초콜릿을 맛보고 페레로로셰를 맛봤을 때 느껴지는 상대적 가벼움과 유사한 느낌입니다. 이 가벼움이 편안한 분위기를 연상시킵니다. 심각하거나 진지해지지 않고, 안심되고 편안한 여러 분위기. 저는 해변이 떠오릅니다.
꽃향기가 꽤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실 저는 향기와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해변은 도시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을것 같습니다. 짠내가 아니라 꽃향기가 나려면 주변에 꽃이 상당히 많이 펴 있어야 할테니까요. 해가 좋은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전원적인 해변이 떠오릅니다.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팀의 부모님 댁도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해변에 앉아 있으면 조금 떨어진 집 안에서 보사노바가 들릴것 같습니다.
버번캐스크에서 숙성한 탓에 은근하게 나는 바닐라의 맛은 이 가벼운 일상에 조금의 향수를 더하는것 같습니다. 힐링 일상 웹툰처럼 마냥 여유로운 하루보다는 슬픈 결말을 아는 영화의 초반부를 보는 것 처럼, 이 일상과의 결별을 염두해둔 살짝 아쉬운 여유로움입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가족적인 기분이 듭니다. 떨어져 지내면 그립고 붙어지내면 지긋지긋해, 늘 이별을 예견하는게 가족이기 때문일까요. 해변과 그 주변 집에는 가족들이 있을것 같습니다.
더욱이 가벼움을 더해주는 청사과향에서 해변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해변은 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휑하지도 않은, 제 가족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해변입니다. 바디가 약한지, 맛이 가벼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금방 사라져버리는 맛이 이 은근한 그리움을 더 진하게 하는것 같아요.
저한테 언제 생긴지 모를 아이들이 쑥쑥 자라 제 주변을 떠날 날을 벌써부터 아쉬워하며 날씨 좋은 해변에서 선선한 바람을 즐기는 모습이 고작 이 한잔으로 그려진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한 잔인지! 언젠가 혼자 방문했던 세븐 시스터즈에 가족과, 특히 생길지 모를 아이와 함께 가게 된다면 그땐 꼭 더 글렌리벳을 한 잔 해야겠습니다. 집 앞 공원에서 가볍게 한잔하며 남의 아이가 뛰어노는걸 보는것도 충분히 즐겁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