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것은 없다

4.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by 이리니

예전 시골 할머니 댁에는 마당 한편에 사람이 한 명 들어앉아도 될 만큼 커다란 빨간 고무통 있었습니다.

그 빨간 고무통은 비 오는 날에 빗물을 받아서 보관하는 용도였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면 되는 시절이었는데, 우물물도 아끼던 유난한 성격의 할머니 덕에 빗물을 받아서 생활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고무통의 물은 빗물여서 가라앉힌 후에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가라앉힌 깨끗한 빗물에 갓 따온 과일을 간단히 씻기도 하고, 빨래를 할 때 덜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잘 가라앉혀야 하는데, 동생들이 그리 얌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일까요.

한 번씩 이유 없이 휘휘 저어서 맑아진 물을 다시 흐리게 만들고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니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 어떤 계기로 예전의 어떤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그 빗물통의 부유물들처럼 내 마음도 탁하게 어지러워집니다.

나를 화나게 했던 것들, 서운하게 했던 것과 속상했던 여러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 때는 내 기억력이 너무 좋은 것이 힘들 때도 있지만 사과와 용서가 없었던 일은 기억해두려고 하는 제 성격 덕에 감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고요한 감정을 한 번씩 휘젓고 뒤집어놓는 경우의 큰 지분은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떠오른 기억에서 사과받지 못해서 용서 못하는 기억이 떠올라서 얘기를 하게 되면,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었냐며 얼른 잊어라 용서해라 하며 결국은 너그럽지 못하고 속이 좁다며 나를 비난하는 말로 이야기가 종결됩니다.

사과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미안한 사람에게 용서해 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고, 용서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피해를 보상받고 마음이 치유되어야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마부터 나에게 자꾸 용서를 강요하지 말고, 그동안 나를 속 좁고 너그럽지 못하고 참을성 없다고 함부로 비난한 말을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엄마와 5분 이상 대화를 하면 꼭 기분이 상하는 상황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 휘휘 저어서 마음의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니는 혼란이 올 때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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