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다시 읽기
동심이 와르르 멘션처럼 무너졌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근래 동심 와르르 기분을 느낀 일은 언제 읽어도 마냥 좋을 줄만 알았던 <어린 왕자>에서 유독 장미에 부정적인 수식어가 많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아, 정말! 그녀는 너무 요염한 창조물이었다!
어린 왕자는 꽃이 그다지 겸손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자극적이고 심금을 울리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꽃은 태어나자마자 허영심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꽃은 아주 까다로운 생물이군...
꽃들은 아주 모순덩어리거든!
장미는 <어린 왕자> 속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다. 뱀이랑 여우는 동물이니까 차치한다 치고.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나 여러 별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지리학자, 왕, 술꾼, 허영심 많은 남자, 사업가, 가로등 지기는 생텍쥐페리가 삽화 자체를 남성으로 그려 놨으니 확인할 필요도 없고, 지구에 와서 화자를 만나기 전에 잠시 대화를 나눴던 철도원과 장사꾼 역시 남성이다. 사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어린 왕자> 책으로는 철도원과 장사꾼의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 철도원이랑 장사꾼은 삽화도 없고, '그가 말했다' 같은 인칭 대명사도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어린 왕자>를 열 몇 살, 처음 읽었을 때부터 그들은 내 머릿속에서 남성으로 그려졌다. 직업의 이미지에서 오는 편견 때문이었을까.
왜 장미만 '그녀'일까? 뱀도 여우도 계속 '뱀이 말했다', '여우가 말했다', 뱀뱀뱀, 여우여우여우로 나오는데 굳이 장미만 '그녀'라고 했을까. 번역하는 중에 생긴 오류는 아닐까? 우리나라가 유독 여성을 꽃에 비유하니까, 번역가가 무의식 중에 '그녀'라고 번역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찾아보며 <어린 왕자>를 다시 한번 훑어 봤다. 내가 놓친 여성 등장인물은 없을까, 남성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은 없을까. 어린 왕자가 여러 별을 여행하면서 만난 수많은 멍청한 남자들한테는 '이상하다'는 표현이 끝이었다.
<어린 왕자> 영문에는 장미 이야기를 할 때 'she'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 사람이다. <어린 왕자> 원문 역시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프랑스어 1도 모르지만, 원문을 다운받아 장미 부분을 살펴봤다! 'elle'이라는 여성형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반전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프랑스어는 성별 구분해서 말한다는 게 생각났고, 그렇다면 원문을 본다면 철도원과 장사꾼의 성별 의문이 풀리지 않을까? <어린 왕자> 원문을 파파고랑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찾아본 결과 장사꾼은 확실히 남자가 맞는 거 같은데 철도원은 확증(?)을 도저히 못 찾겠어 <어린 왕자> 프랑스어 오디오 북을 몇 개 들어 봤다. 철도원과 장사꾼은 물론 뱀과 여우의 목소리도 남성이었다.
<어린 왕자>에 식물이 아닌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글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근 20년이 걸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어린 왕자>를 완독하고 10회 이상 읽었을 텐데, 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에 여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 챘다. 이 부분 말고도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꽃인 줄 알았는데, 지구에 와서 오천 송이가 피어 있는 장미 정원을 보고 혼자 실망했다가(본인 별의 장미가 특별하지 않으니까!) 여우한테 가르침을 받고 갑자기 오천 송이 장미 정원으로 다시 가서 ["너희들은 내 장미와 전혀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 중요한 존재가 아니야.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는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는 예전에 내가 처음 봤던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그러자 장미들은 무척 당황해했다.] 얘기하는데... 솔직히 장미들 당황한 게 아니고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너는 특별한 여자야,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줘, 근데 알고 보니 너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 너를 떠나야겠어, 다른 여자 만나봤는데 역시 너만 한 여자가 없다' 왜 이런 어디서 많이 본 뻔한 스토리가 생각나는지... 동심 와르르.
물론 <어린 왕자>에서 여전히 좋아하는 부분도 있다. 모든 어른은 한때, 아이였다는 것. 나도 한때는 아이였고, '당신은 어른들처럼 말하고 있어!'라는 어린 왕자의 말에 괜히 뜨끔한 어른이 됐다. 어른이 되기 싫었고, 여전히 어른인 내가 낯설다. 동심을 잃는 것도 무서워했던 거 같고.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고, 동심이 옅어지면서 어렸다면 알기 힘들고,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늘어간다는 건 삶을 팍팍하게 만들지언정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