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현대차 정몽구재단이 주최한 '미래지식포럼'이라는 온라인 세미나에 참석했다.그리고 세미나에서 이 글의 제목과 동일한 주제의 강의를 들었다.
고려대심리학부 허지원 교수님의 강의였는데, 강의의 골자는 완벽주의만 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탈출 버튼이 되어주자는 것이다. 탈출 버튼? 이게 무슨 말이냐.
교수님에 의하면 요즘 MZ세대는 세계 2차 대전 때 태어난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스트레스 지수를 가진다고 한다. 겉으로는 그때 대비 가진 것도 많고, 훨씬 안락한 환경에서 사는 MZ세대가 무슨 동일한 스트레스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스트레스는 완벽주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은 '통제불가능성', '예측불가능성' 두 가지로 나뉘는데, 예측불가능성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하게 먹든 내 원천 기술 수준을 높이든 내가 통제가능한 범위를 최대한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통제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의 예시를 들자면,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공부를 할 때 내 옆에 누가 앉을지는 예측불가능의 영역이다. 시끄러운 아줌마 부대가 앉을지 조용한 카공족이 앉을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반면에 통제가능성이란 아줌마 부대가 옆에 앉았을 때 '이미 커피값은 냈지만, 조용한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공부를 해야겠군!' 이라던지 '시끄럽긴 하지만, 난 소음 속에서도 집중 잘하잖아?'라며 본인이 처하게 된 상황을 통제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 걸 말한다.
이런 통제불가능성은 앞서 언급했듯 내 마음가짐이나 본인의 원천 기술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아직 원천기술 수준을 딥하게 쌓을 시간 자체가 부족한 MZ세대는 최대한 편안하게 느긋한 마음을 가질 때 비교적 통제불가능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MZ세대를 뒤덮는 '완벽주의라는 불안'은 단 한 번의 실패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내가 이 기회를 지금 놓치는 게 아닐까?라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통제감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다.
사실 멀리 가지 않아도 완벽 강박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나다. 나는 자타공인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만 열심히 살아온 착한 큰 딸이다. 8학군 졸업자는아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전교 1등에, 모교에서 외고를 처음으로 진학하고, SKY 조금 밑의 나쁘지 않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곤 칼졸업에 대기업까지 입사했으니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에, 취업은 대기업이지! 란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자란 그런 착한 아이 말이다.
물론 부모님을 원망한다거나 왜 나를 온실 속 화초로 키웠냐며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부모님도 본인들이 옳다고 생각하신 방법으로 나를 키우셨겠지. 하지만 내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학원도, 취미도, 심지어 입사하면 좋을 회사나 좋은 남편 상까지 내가 곰곰이 생각해서 이뤄냈다기보다는 큰 고민 없이 대부분 '부모님이 제시하신 실패가 적을 안락한 길'을 따랐기에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를 맛보고,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그걸 바탕으로 더 성장한 경험이 없다.
몇 년 전 내가 이직을 희망했던 한 IT기업 면접에서 '살면서 처절하게 실패한 경험이 있는가?'란 질문을 했다. 내가 전 직장에서 한 프로젝트 등 자랑거리는 한 포대나 준비했는데, 사실 이 질문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29살이나 먹어서 10년도 더 된 일인 '재수요.'라는 답을 했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탈락 통보를 받고 면접 질문을 복기하며 '진짜 내가 실패한, 후회한 경험은 뭐지?'라는 생각을했을 때 다시 과거를 곱씹어봐도 정말 후회되는 에피소드로 재수 외에 그 어떤 일도 떠오르지 않았고, 재수 역시 현역으로 입학한 학교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고등학교에서 함께 같은 대학으로 입학한 친구가 반수를 한다는 말에 이끌려 시작한 것이기에 그렇게 후회스럽지도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일련의 내 인생길을 돌아보면 혹자는 '탄탄대로만 걸어오셨나 봐요.' 라며 부러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에 허지원 교수님의 논리를 대입하면 평생 잘 포장되고 안전한 길만 걸어온 나는 다른 이들 대비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이전까지 그래왔듯 크게 무리 없는 선택만 할 것이란 말로 해석이 될 것이다.
MZ세대의 끝자락에 있는 날 요즘 들어 가장 크게 압도하는 감정은 일이 너무 재미없고, 극단적으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대체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인생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럼 퇴근 후에라도 네가 좋아하는 걸 해봐.'라고 제안한다. 그런데 정말 슬픈 건 난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노쇠하신 부모님이 이 동네에 집 사렴, 주재원 가봐 등 내 앞 길을 정해주실 수도 없거니와 정해주셔도 안 되고, 이제부터라도 내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잘했다고 할 수 있을지 사실 모르겠다. 그냥 관심이 생기고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TRY! 하면 되는데, 어찌 보면 검증되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부담으로 느껴지기에 해오는 것만 돌림노래처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허지원 교수님의 '서로가 서로에게 탈출 버튼이 되어주자.'라는 말이 실패하면 안 돼. 검증된 길로 가서 성공해야만 해. 라는 지난 30년 간 쌓아온 내 완벽주의 강박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해열제같이 느껴졌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걸 시도했다가, 조금 돌아도 가보고, 시간 낭비도 해보고, 돈도 의미 없이 써보고 하면 좀 어떠한가? 그 처절한 실패들이 축적돼 날 일으키고, 지속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이 될 텐데 말이다. 나 역시 조금 늦었지만 먼저 나 스스로의 탈출 버튼이 되어주려 한다.
강의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유튜브 링크를 달았다. 개인적으로 교수님 딕션도 너무 좋고, 자료 화면도 알차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청했으니, 독자분들도 시간을 내시어 영상을 꼭 한번 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