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이는 뱃살을 가위로 잘라내는 기괴한 꿈
반복되는 야근에, 짜고 단 음식, 운동을 안 하니 몸도 정신도 맛이 간다
인간 종잇장인 아빠 덕분에 나는 타고나기로 뱃살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몸매란 것에 대한 인지가 없던 중학생 때부터도 학원에 가면 언니들과 선생님들이 '얘 허리 잘록한 거 봐~'라며 내 배를 만져보던 기억이 난다.
한창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고등학생, 대학생, 사회 초년생 때까지도 아직 어려서인지 뱃살 없는 유전자의 힘은 강하게 발현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개미허리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나 또한 그런 내 신체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해 짱짱하고 딱 붙는 상의를 자주 입어왔다.
그렇게 '잘록 허리 부심'을 가지고 살아오던 내게 잦은 야근으로 인한 앉아있는 시간 과다, 헬스장 못 감, 빨리 먹고 오자 마인드로 택하는 패스트푸드와 약간의 알코올이란 3요소는 30년 간 유지해 온 개미허리를 단숨에 통짜를 넘어 출렁이는 뱃살의 소유자로 탈바꿈시키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상의의 허리 부분이 신경 쓰여 옷을 갈아입은 적은 없었는데, 요새는 청바지에 기존에 가지고 있는 딱 붙는 상의를 입으면 러브핸들 부위가 과하게 부각되어 기분 좋게 입었던 옷을 몇 번을 갈아입고 출근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평생 다이어트가 숙제라고 하지만, 그래도 내 경우 딴 데는 몰라도 뱃살만큼은 안 찌겠지! 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지내와서 인지 요즘 내 뱃살에 대한 집착과 생각은 과도할 정도로 심각해져 갔다.
그 집착이 어느 정도냐 하면 앉을 때 접히는 뱃살이 신경 쓰여 하도 만지작대다 보니 샤워할 때 보면 배 라인에 꼬집은 자국이 시뻘겋게 들어있는 건 다반사고, 치마를 입을 때 도드라지는 뱃살을 감추려 구매한 보정 속옷이 너무 꽉 끼기도 하고 통풍을 방해해 땀띠가 나기도 했다..ㅋㅋ 정말 별로였다.
그렇게 신경 쓰일 정도면 그냥 점심이라도 굶던지 짬을 내서 운동을 하던지 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들 직장 생활하시면 아시지 않는가. 혼자만 저는 계단으로 올라갈게요! 아 저 오늘은 샐러드 시켜서요! 라며 단체 활동에서 빠지는 것도 한두 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긴 야근 후의 치킨과 맥주는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조합이란 사실을 말이다.
올 초부터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지난 몇 달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뱃살만 꼬집던 일상이 이어지던 어젯밤, 이런 스트레스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어제 퇴근길에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내용의 공포 영화를 본 탓도 있겠지만 어젯밤 내 꿈에 등장한 내가 뱃살을 큰 가위로 자른 뒤 지방을 빼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은 분명 나인데 내가 타인의 시선으로 그런 기괴한 분리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고, 육성으로 소리를 낸 건지 그 비명 소리에 내가 놀라서 잠에서 깼다.
평소에 꿈도 잘 안 꾸는 편인데, 정말 오랜만에 꾼 꿈이 셀프 컷팅을 하는 거라니. 하다 하다 이 스트레스를 꿈에 까지 가져가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고, 진짜 뱃살 문제를 해결하고 싶구나란 생각에 내가 안타깝기도 했으며, 일상에서 마음을 쓰는 일들은 꿈에서까지 나온단 말이 맞다는 것도 확인했다.
지인들과 꿈 얘기는 많이 해본 적이 없어 표본이 한정된 터라 꿈을 자주 꾸는 것도 타고나는 건지, 아니면 꿈은 정말 랜덤 한 건지 모르지만 내 경우에만 한정지어서 보자면 평상시에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아 생각하는 내용들이 높은 확률로 꿈에 등장하는 건 맞아 보인다. 헌데 내 경우는 그게 뱃살에 대한 스트레스처럼 부정적인 생각일수록 더 강하게,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꿈이라는 무의식 세계에까지 표출되는 것 같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번 꿈 이전에 가장 최근에 꾼 꿈이 전 팀이 폐지되고 현 팀으로 흡수될 당시 내가 혹시 잘린다거나 지금 팀마저 사라지면 어쩌지 하며 생존에 대한 걱정을 심각하게 했었는데, 그 고민을 반영한 건지 3명인 내 팀 구성원 중 나를 제외한 팀장님과 과장님이 이직한다며 나를 사무실에 두고 떠나는 내용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나 로또 당첨에 대한 희망 등 긍정적인 것들은 일상 생활 속 자주 떠올린다고는 하지만 걱정되는 것들을 떠올리며 골똘히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 대비 그 생각의 깊이가 얕아서 인지 즐거운 내용들은 단 한 번도 꿈의 소재로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꿈속 이미지 자체가 괴기스럽기도 했고, 그런 꿈에서 깬 상태로 하루를 시작한 게 상당히 불쾌했기에 나는 앞으로 또 이런 내용의 꿈을 꾸는 걸 지양하기 위해 머릿속에 가득 찬 뱃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최대한 날리고자 오늘 하루 동안
1. 스탠딩 책상에서 일하며 뱃살 접히는 느낌을 최소화했다.(그나마 앉을 때보단 덜 접히니까ㅎㅎ)
2. 아쉽게도 굶진 못했지만 자주 가는 회사 앞 BBQ, 맥날을 무시하고 탄수화물이 거의 없는 고단백 어복쟁반을 먹었다.(도움이 되는 거 맞겠지?)
3. 야근할 때 거의 택시를 타고 퇴근하느라 하루에 만 보를 못 걷는 날이 수두룩했는데, 오늘은 전철로 퇴근하면서 집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 하나 전에 내려 돌아돌아 집에 들어갔다. (내 아파트가 대단지라 집까지 걸어서 20분이나 걸렸다.)
물론 고작 이런 3개의 작고 귀여운 노력을 했다고 벨트선을 비집고 나온 내 뱃살들은 기존 대비 1mm도 변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 머릿속에는 어떡하지?라는 노답 고민보다는 뭐라도 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더 지배적이다.
아마도 오늘 나는 어떤 꿈도 꾸지 않은 채 단잠을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