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제각기의 이유로 무척이나 힘들다.
따님 라이드 후 출근하는 부장님, 유치원생 딸도 못 보고 야근하는 차장님
요즘은 야근을 밥먹듯이 하느라 TV와 멀어졌지만, 한창 SBS 플러스에서 방영하는 예능 '나는 솔로'를 본방으로 즐겨본 때가 있었다.
'나는 솔로'는 한 기수 당 여러 명의 싱글 남녀가 출연해 데이트를 하며 커플 매칭을 하는 내용으로 벌써 16 기수나 진행된 장수 프로그램인데, 그중 몇몇 개성 넘치는 참가자들의 뼈 때리는 발언들이 같은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시청자까지 움직이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중 9기에서 광고회사 차장님인 여성 출연자와 경륜 선수인 남성 출연자가 데이트를 하며 나눈 대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차장님과 경륜 선수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는데, 경륜 선수가 나는 솔로에 참여하며 먹은 음식들이 부실했는지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밥만 줄기차게 먹었다. 차장님이 민망했는지 음식이 맛있냐며 말을 걸었지만, '일단 밥 먼저 먹고 나서 얘기합시다.'라며 경륜 선수는 말을 딱 잘라 끊었다.
물론 경륜 선수의 행동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나도 바디 프로필을 준비하느라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이 끝난 뒤 도와준 친구와 들른 음식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계속 먹은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장님의 발언은 이랬다. "모든 출연자가 '나는 솔로'를 촬영하며 힘든 건 똑같다. 경륜 선수는 원래 먹던 양에 못 미치는 식사를 해서 허기졌겠지만, 나는 높은 힐을 신고 하루 종일 촬영 때문에 서있느라 진이 빠진 상태고, 다른 남성 출연자는 촬영과 업무를 병행하느라 잠을 잘 못 자기도 하는 등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간 내에 상대에게 어필하고, 짝을 찾아 나가는 것'을 목표로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렇게 본인만 힘들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느 누가 당신을 좋게 보겠는가?"
이 말을 들은 경륜 선수는 머쓱해하며 그제야 이야기를 하자며 숟가락을 내려놓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커플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나는 솔로 차장님의 발언이 내게 임팩트를 준 건 나도 회사에서 경륜 선수같이 '내가 제일 힘들어. 이 중에서 지금 내 상황이 제일 comlicated 해.'라고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굴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직장에서의 내 주된 업무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15장짜리 대표님 대상 보고서를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나로 이루어진 4명이 각자의 파트를 채워서 합치고 수정하는 일을 반복하는데, 키맨인 부장님은 각자 맡은 부분이 다르더라도 따로 일하는 것보다 한 회의실에 모여 같이 수정하는 것을 선호하신다.
하지만 나는 우리 그룹 4명 중에 가장 어려서인지 아니면 유일한 미혼이어서인지 평일 저녁에 약속이나 학원 등의 스케줄이 있고, 이런 스케줄들을 끝내고 집에 가서 야근을 하며 내 파트를 마무리 짓고 싶은데, 부장님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 없는 것인지 정규 근무 시간이 끝나고 저녁을 함께 먹고 다시 들어와 업무를 끝내고 귀가하는 루틴을 세팅하셨다.
처음 몇 번은 나도 전체의 흐름에 동참해 밥도 같이 먹고 야근도 같이 했지만, 보고서 제출일이 급박할 때마다 이런 저녁 식사+함께 야근이 반복되니 학원은 학원대로 빠져야 하고 약속은 약속대로 펑크내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나는 개인 일정 이후에 내 파트를 마무리하고 출근 전까지는 팀원들이 보실 수 있도록 만들어놓겠다는 식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
가장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적어도 내 할 일은 펑크 내지 않고 제 시간까지 해내고 있으니, 팀원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다고 굳게 믿어왔다. 나는 회사 일 외에도 개인 일정이 정말 많은 MZ세대이고, 어차피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들은 개인 약속도 별로 없으시고 굳이 집에 일찍 들어가느니 저녁까지 회사에서 해결하시고 가는 게 오히려 사모님들이 더 좋아하실 테니까!라는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믿음은 지극히도 이기적임을 나는 솔로 차장님의 워딩, 그리고 부장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다. 부장님은 매일 아침 따님을 학교까지 라이딩해 주고 출근하고 계셨고, 퇴근해서도 사모님으로부터 하수구 막힌 것 뚫어달라, 방충망 청소 좀 해달라 등의 집안일 분담 요청을 받고 계시며, 우리 보고서 외에도 다른 파트와 협업하는 최소 2~3가지 업무를 더 하시는 중이셨다.
그럼에도 늦게까지 한 회의실에 모여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가시는 건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게 훨씬 효율이 높다는 걸 다년간의 회사 생활을 통해 깨달으셨기 때문이고, 오늘 팀원들이 본인 파트를 마무리한 걸 확인해야 본인이 마지막으로 보고서 전체를 훑고 퇴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장님과의 대화 전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오전에 다 같이 모여서 리뷰하기로 했으니 오전 전까지만 파트를 마무리해놓으면 되겠지!라는 굉장히 나이브한 생각밖에는 하지 못했고, 내 행동이 부장님의 워라밸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은 파트의 차장님도 매일 야근을 하시느라 유치원생인 따님 얼굴을 주말에나 볼 수 있다며 속상해하셨고, 과장님도 최근 이사를 하느라 매일 같이 집에 들어가면 청소에 가구 세팅에 전쟁인 상황이라고 하셨다.
나는 솔로 차장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다 제각기의 이유로 힘들다. 갓난아기 정도가 아니고서야 초등학생들도, 전업 주부들도, 직장인도, 자영업자도 모두 다 매일매일이 힘들겠지? 그런데 나는, 어쩌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힘듦, 고충에만 매몰되어 있느라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노력, 희생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즘같이 어렸을 때부터 '나' 위주의 삶을 살고, 내가 최고인 환경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나처럼 부장님과의 토크, 아니면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 출연자의 말에서 얻은 깨달음이 있지 않는 한 평생 '내가 제일 잘 났고, 내가 제일 힘들어'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확률이 더 크다.
좀 더 나은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상황도 이해하고 존중하는 여유를 가지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내가 직장 생활 8년 만에 어렵게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이 글이 주변에 편재하지만 인식하지 못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