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을과 겨울은 인도네시아의 우기이다. 한국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단풍이 지고, 눈이 오는 두 계절을 지나는 동안, 이곳에선 그저 비가 오고 더운 하나의 계절만을 경험할 뿐이다. 건기보다 에어컨을 덜 틀어도 되니까 전기세가 절약되는 측면이 있지만 곰팡이가 계속해서 생기고, 빨래가 마르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비를 피해 고양이들이 천장에 올라가 뛰어다니기도 해서 시끄러울 때도 있다. 물론 쥐 혹은 큰 도마뱀일 수도 있어 신경이 쓰이기도 하는데 도마뱀이 손바닥 만할 땐 봐줄 만 하지만 팔뚝만 한 도마뱀을 보는 것은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내일부터 며칠 동안 가족이 함께 자카르타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며칠간 계속된 비로 그동안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젖은 빨래를 두고 가면 사흘도 되지 않아 곰팡이 범벅이 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한 4년 만에 처음으로 빨래방에 가서, 집에 있는 빨래를 다 마무리하고 왔다. 캐나다에 살 때, 그리고 미국을 길게 여행할 때, 빨래방을 종종 이용했었다. 건조기에 돌린 빨래가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곳에서도 건조기에 돌린 빨래는 동일하게 뽀송뽀송해진다. 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습기에 젖어 축 늘어진다는 점만 다르다.
이곳에선 단지, 빨래방을 이용하는 것보다 세탁소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에 빨래방에 갈 일이 없었다. 주로 우기에 빨래가 많이 밀리면 세탁소에 전화를 해서 세탁서비스를 이용했었는데 익스프레스가 아니라면 1kg 빨래의 세탁, 건조, 포장, 수거 및 배달 비용은 한국돈으로 500원을 넘지 않는다. 이번엔 두 주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Jl. Palagan이라는 길에 있는 빨래방을 급하게 이용하게 된 것이다. 대형 캐리어 가득 빨래를 채워 가지고 가서는 세탁기를 두 번, 건조기를 두 번 돌렸다. 빨래방이지만 완전 무인은 아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건조기를 옮기고 하는 일은 셀프지만 직원이 상주하며 방법을 알려주고 카드를 이용해 세탁기를 돌려준다. 50원 정도 하는 세제를 몇 개 넣었는데, 이만큼의 빨래엔 세제를 몇 개 넣어야 하는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곳의 물가는 늘 인건비보다는 기계의 성능이 좌우한다. 빨래방의 기계들이 좋아 보였고 하얏트 호텔 근처에 있는 빨래방이기 때문에 가격이 좀 비싸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대형 캐리어 하나만큼의 빨래를 세탁하고 건조하는데 든 비용은 한국돈으로 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세탁소에 전화를 했다면 좀 편하게 빨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집약적, 자본집약적, 기술집약적...이런 경제개념들을 학교에서 배울 때는 머리로만 이해됐었는데 이곳에선 삶을 통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많은 경우 기계세차보다 손세차가 싸고, 셀프 빨래방보다 수거 및 배송을 해 주는 세탁소가 경제적이다. 비싼 기계를 들이는 데는 많은 돈이 들지만 사람을 쓰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으로 나오는 집의 아내분들은 두 번 운다는 농담이 있다. 처음엔 가기 싫은 나라에 따라가야 해서 울고, 두 번째는 이곳의 싼 인건비 때문에 가정부와 기사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다가, 한국에 돌아가면서 이를 포기하는 것이 서운해서 운다는 것이다.
이곳의 인건비와 경제구조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하지만, 인건비가 오르고 경제구조가 바뀌면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하지 않을 것이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니 그 또한 이곳 사람들에게 더 좋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문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