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알지 못했던 찬란했던 역사의 기록들
인도네시아의 역사,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해 같이 공부하던 선생님들께서, 한 번은 인도네시아에서 갈만한 박물관이 어디인지 좀 추천해 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족자카르타에 있는 대승불교사원인 부로부두르(Borobudur)나 힌두사원인 쁘람바난(Prambanan) 같은 세계문화유산에 올라있는 건축물들이 있지만 박물관 자체는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자카르타의 꼬따 뚜아(Old Town)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는데, 식민지 시대 유물들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었고 건물 자체도 네덜란드의 총독부로 쓰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궁전이나 박물관들을 다녀봐도 그렇게 인상적인 유물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었다.
홈스쿨링 중인 아이들이 방학을 맞았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자카르타에 왔다. 이곳에서 며칠 묶으며 박물관과 동물원 등을 견학하기로 했다. 오늘은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Museum Nasional Indonesia)을 방문했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인상적인 유물이 별로 없다고 평가했던 것에 대해 상당한 민망함을 느끼게 되었다. 모타스 타워 옆에 있는 박물관 건물도 멋졌고, 도로도 깔끔했으며, 언제나처럼 사람들도 친절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의 역사와 문화, 국력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하다는 걸 느끼곤 하는데, 아무래도 그들에 대한 나의 부족한 존중감이 인도네시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일단 들어가면 첫 전시실이 나오는데 석상들과 석비들로 가득 차 있다. 첫 전시실을 지나면 중정인데 중정의 잔디밭과 그 주변의 회랑도 전부 석상들이다. 흰색 페인트로 넘버링된 문화재의 번호들이 인도네시아인들에 의해 붙여진 건지, 아니면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부에 의해 붙여진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 우리의 여러 문화재들처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을 떠돌고 있는 것들은 없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주로 족자카르타를 비롯한 자바지역과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한 수마트라 남부에서 출토된 것들인데 힌두교 혹은 불교문화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수마트라 남부의 스리위자야 왕조는 불교왕조였다. 승려 혜초가 인도에 갈 때, 바닷길을 통해 갔다가 실크로드를 통해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스리위자야 왕국에 들렀을 거라는 강한 추정이 있다. 족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자바의 마타람(Mataram) 왕국에서는 불교와 힌두왕조가 차례로 번성했는데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은 그런 역사 가운데서 각각 므라삐 화산(Mt. Merapi)의 서편과 동편에 세워졌다. 얼마 전 플라오산(Plaosan) 사원을 지나갈 때도 힌두교식 파고다뿐 아니라 불교식 파고다도 섞여 있었는데 이미 두 종교, 두 문화가 한 국가 내에서 오버랩된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마타람 이후의 마자파힛(Majapahit) 제국은 힌두왕국이었는데 마자파힛의 후반기에는 이슬람이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제국이 무너질 때 곳곳에는 새로운 술탄국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패망한 제국의 왕조는 왕가와 귀족,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발리로 피신하여 가까스로 힌두왕국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발리가 힌두교지역인 이유이고 우붓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바의 마자파힛 제국은 명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었는데 정화의 원정대가 자바에 머물기도 하고 수라바야와 스마랑에는 정화와 관련된 이슬람 사원과 도교사원이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정화를 무슬림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두 종교 모두 정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는 이유이다. 명나라의 도자기 중에 아랍어로 기록된 도자기도 전시되어 있고 근대의 유물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섬유문화인 바틱을 전시한 수라카르타의 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는데, 인도와 유럽, 중국과 일본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걸 볼 수 있었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말레이인들의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무역을 하던 누산따라의 사람들은 그렇게 그 중간에서 문화의 융합을 이뤄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음악인 가믈란과, 전통 그림자 인형극인 와양 꿀릿은 인도네시아 본연의 Unique 함을 잘 보여주는데, 여러 문화가 섞여 있으면서도 그 독특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요소일 것이다.
자바의 남성들은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는데 여전히 집에 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들이 총을 좋아하는 것처럼, 인도네시아인들은 칼을 참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역시나 시기별로, 지역별로 많은 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와양 꿀릿과 바틱은 당연히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황금 유물들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딸아이는 고대의 돼지 저금통이 예쁘다고 돼지 저금통 앞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상당수의 유물이 출토된 지역이, 지금 살고 있는 족자카르타 주변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군도는 자바 원인을 비롯해서 인간거주의 역사가 상당한데, 한 전시실에는 오스트로네시안들이 북부지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군도까지 이주한 루트들이 잘 설명되어 있었다. 지난 학기 가자마다대학에서 역사와 고고학을 강의하시는 다우드(Daud) 교수님과 세미나를 한 학기 함께 했었는데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다우드 교수님의 설명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신기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유물 전시에 관한 몇 안 되는 최고 전문가라고 역사학과 교수님께서 소개하셨었는데 큐레이팅에 참여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용들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런 거 상관없이 나를 끌고 해골을 보여주는데 열심이다. 아빠, 진짜 무서운 거 있어, 아빠 안 놀랄 수 있어? 하면서 말이다.
오늘 배운 건, 누군가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으며, 그걸 알아봐 주는 것이 예의와 존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을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민망하고 죄송했던 이유다. 이들이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공존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할 때, 나는 가끔 까칠하게 그 혼합주의(Syncretism)의 가능성을 비판했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저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에 대해서, 깜짝 놀라며 대단하다고 인정해 줬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의 문화, 당신들의 역사, 당신들의 국가 정말 대단해, 나 지난달에 박물관 갔다가 정말 놀랐어. 당신들이 이렇게 대단한 민족인지 처음 알았어,라고 말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