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정리하는 인도네시아 역사1
배경과 고대사(사진은 pixabay free image)
*Colin Brown이 2003년에 호주에서 출간한 A SHORT HISTORY OF INDONESIA 가 짧으면서 깔끔하게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목차를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책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발췌, 요약이라고 보면 되겠다. 어느 국가의 역사나 마찬가지겠지만 국가의 흥망성쇠가 명쾌하게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연대가 중첩되어 있다. 정리하다 보니 내용이 조금 많아져서 1. 배경과 고대사, 2. 중세사, 3. 근현대사의 세 부분으로 나눠서 업로드하도록 하겠다.
1. 배경(The Indonesian Context)
저자는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라는 이름과 지리(기후), 인종 구성 등의 배경으로 책을 시작한다. 인도네시아라는 국명은 영국의 지리학자인 James Richardson Logan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Indian Islands"라는 뜻이다. 한국인들이라면 다른 나라의 학자가 비교적 최근에 붙인 명칭을, 그것도 인도와 관련하여 사용했던 것을 국명으로 쓰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백 개의 종족, 수백 개의 언어, 그리고 17,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종족별로 파편화된 역사를 지닌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이 이름은 좀 다른 느낌이다. 식민시대에는 지배국이었던 네덜란드에 의해서 Nederlands Indie로 불렀었는데 영국 학자에 의해 명명된 인도네시아라는 국명은 오히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국가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대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들인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들을 설득해가면서 이 국명과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 그리고 빤짜실라(Pancasila) 등을 계속해서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프랑스의 역사가 그룹인 아날학파처럼 콜린도 역사를 설명하며 지리(기후)에 짧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인도네시아는 오래전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인도네시아의 서부지역은 Sunda Shelf(순다붕)으로 동남아시아의 대륙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순다붕은 깔리만딴과 발리까지를 그 경계로 하는데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나무와 티크, 코끼리와 원숭이 등 아시아와 동식물의 식생이 일치하며 바다도 깊지 않다. 반면에 Sunda Shelf의 동쪽은 식생이 호주와 가깝고 바다도 상당이 깊다. 유칼립투스, 캥거루 등의 동식물을 인도네시아 동부에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인도네시아는 몬순기후 때문에 여름에는 남동풍이 겨울에는 북서풍이 부는데 이는 무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동력이 없던 선박들은 바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몬순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상인들은 북반구의 여름에 중국으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겨울 몬순은 다시 그들을 집으로 올 수 있게 한다. 인도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여름 몬순은 인도의 벵갈만으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방향으로 항해를 할 수 있게 하고 겨울 몬순은 반대로의 항해를 가능하게 한다. 말라카 해협과 자바해는 그렇기 때문에 북반구의 여름과 겨울을 기준으로 서쪽의 인도와 북쪽의 중국으로 쉬지 않고 무역선이 오갈 수 있게 하는 천혜의 환경을 만들었다.
인도네시아의 인종 구성은 크게 동부의 멜라네시아인과 서부의 오스트로네시아인으로 구분된다. 멜라네시아인이 먼저 인도네시아 지역에 도착했고 오스트로네시아인은 이후에 중국 남부로부터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발전된 지역은 자바섬이었으며 국가의 형태는 기원후 초반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국가의 부상: 1-1500년
이 시기의 역사는 종교와 무역으로 대표된다.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가 인도네시아에 전래됐고 이는 인도네시아의 언어, 학문, 법, 행정 등에 영향을 미친다. 무역 파트너는 인도와 중국이었고 몬순기후로 인해 좋은 무역로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교역품만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사람들도 교류하게 했다.
인도네시아의 고대국가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희박하지만 중국은 기원전 500년 경에도 자바 북부의 항구들에서 교역을 했으며 기원전 1세기 로마의 황제는 인도네시아의 말루쿠제도에서 정향(Cloves)을 공급받았다. 로마 역사가 플리니(Pliny)는 그런 이유로 인도네시아 선박이 기원후 1세기경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서기 700년 경 마다가스카르에는 깔리만딴(보르네오) 남서부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착해 있었다. 이미 이 시기 중국에서 로마제국까지 이어지는 무역 네트워크에 인도네시아가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내적 자료가 희박하기에 중국 문헌에 의존해서 살펴보면 7세기 자바에는 호링(Ho-ling, 중국어로만 기록)이라는 왕국이, 수마트라에는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있었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서기 640년 중국 정부는 자바섬으로 무역 사절단을 보내는데 이는 중국과 인도의 중간에 위치하는 인도네시아 군도의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당시 호링은 무역 중심국가일 뿐 아니라 비옥한 토양을 기반으로 한 농업국가 이기도 했다. 자바섬 중남부의 끄두(Kedu)평야의 쌀은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할 뿐 아니라 주요 수출품이 되기도 했다. 당시 호링의 종교는 불교였는데 이는 기존의 종교들과 융합된 형태였다. 이후의 기록은 희미하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5세기에 말라카 해협(the Straits of Melaka)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중국과 일본, 다른 한쪽으로는 서아시아와 유럽지역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 중심적인 곳에 위치한 스리위자야 왕국은 오늘날의 수마트라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정확한 정보가 있는) 인도네시아 군도의 첫 번째 국가이다. 스리위자야는 후에 잠비 지역으로 수도를 옮겨 13세기까지 존속했다. 특히 이 시기 스리위자야 왕국을 통해 인도네시아 지역 수백 개의 언어 중 말레이어가 교역어로 쓰이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국어가 되기도 했다. 스리위자야는 상업뿐 아니라 선박건조술도 뛰어났는데 10세기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배로 인도네시아 군도에 오게 될 때까지는 스리위자야의 배로만 무역이 이루어졌었다. 12세기부터 스리위자야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는 자바의 마타람 왕국과의 전쟁과 1025년 인도의 촐라(Chola) 왕국의 침공이 있다. 더 중요한 설은 중국과의 관계에 의한 것인데 스리위자야 왕국이 거의 독점적인 지위로 무역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무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스리위자야는 쇠락하는데, 이는 무역국가로서 동남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건재했고 잘 알려져 있던 국가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에 이어 자바에서는 끄두(Kedu) 평야를 중심으로 마타람(Mataram) 왕국이 발흥하는데 이 시기 그 유명한 불교사원인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이 중부 자바의 족자카르타 북서부에 세워졌다. 역시나 이 시기 왕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업생산력과 강력한 무역 네트워크 덕분이다. 이후 마타람 왕국은 수도를 현재의 자바 중부 족자카르타 쪽에서 자바 동부의 수라바야 쪽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928년에서 929년 사이에 있었던 므라삐 화산(Gn Merapi)의 분화 때문이다. 당시 화산 분화로 인해 비옥한 쌀의 생산지에서 일시적인 생산성 저하가 일어났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기능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주요한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화산의 분화를 신의 노여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보로부두르의 건축과 관련해서인데 농민들이 사원의 건축을 위한 노역에 차출되자 이를 피하고자 그 지역을 떠나 도망갔다는 것이다. 마타람 왕국의 마지막 주요 지도자는 아이르랑가(Airlangga, 1016-1049)이다. 아이르랑가는 마타람 왕국의 공주와 발리의 왕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시기 마타람 왕국은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두 아들들에 의해 왕국이 나뉘는데 서쪽은 까디리(Kadiri) 왕국으로 동쪽은 장갈라(Janggala)왕국으로 나뉘게 된다.
까디리 왕국이 바다와 더 가까웠기 때문에 더 강성해졌는데 이후 장갈라 왕국을 합병한 이후 깔리만딴과 발리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1222년 이웃국가인 뚜마뻴(Tumapel) 왕국에 의해 망하는데, 뚜마뻴은 이후 싱아사리(Singasari)로 국명을 바꾼다. 싱아사리의 마지막 왕인 끄르따느가라(Kertanegara, 1268-1292)는 스리위자야 왕국의 쇠퇴를 틈타 서쪽으로는 말라카 해협까지, 동쪽으로는 발리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장시키기 원했는데 이는 중국에 의해 좌절된다. 중국 역시 스리위자야의 쇠퇴를 틈타 말라카 해협으로 진출하여 자유롭게 무역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은 1289년 싱아사리 왕국에 사절단을 보내는데, 끄르따느가라 왕은 조공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사절들의 코와 귀를 베어서 돌려보내게 된다.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1292년 2만의 군사로 자바로의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원정군이 도착하기 전에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생기는데 이전 까디리 왕국의 자야카트왕(Jayakatwang)이 끄르따느가라를 죽이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원정군이 동부 자바에 도착했을 때 죽은 끄르따느가라의 사위인 가덴 비자야(Raden Vijaya)가 그들을 찾아가 자신이 자야카트왕과 싸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설득하게 된다. 그리고 몽골군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 급습하여 물리치게 되는데 이후 현재의 수라바야 남쪽에 마자파힛(Majapahit) 욍국을 세운다.
당시 원나라 원정대 중 많은 수가 마자파힛 왕국에 남게 되는데 이들을 통해 선박 건조 등의 중국 기술이 이식되어 나라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특히 하얌 우룩(Hayam Wuruk, 1350-1389) 치세기에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하얌 우룩의 명재상이자 끄르따느가라의 증손인 가자마다(Gajah Mada)가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엄청난 해상제국이던 마자파힛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수마트라에서 동쪽으로는 필리핀 남부와 뉴기니 섬까지 이어졌다. 당시 제국의 번성에는 중국과 유럽의 향신료 수요가 주요하게 작용했는데 말루쿠제도에서 생산되는 육두구와 메이스, 정향(Nutmeg, Mace, Cloves), 그리고 수마트라와 자바 서부의 후추가 주요 교역품이었기 때문에 이 무역을 잡고 있던 마자파힛이 번성하였던 것이다. 1368년 중국에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정책의 변화가 생기는데 명나라가 중국 남부 상인들의 개인 무역을 금한 것이다. 중국 남부의 무역상들은 처벌이 두려워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게 된다. 명나라는 국가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무역을 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정화의 원정대를 보내게 된다.15세기 초에 마자파힛 제국은 수라바야에서 정화의 원정대의 배를 수리하는 등 오히려 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 부흥은 문화의 발전으로도 이어지는데 중부 자바에서 보로부두르가 건축되었을 때처럼 동부 자바를 중심으로 하는 마자파힛 제국 또한 예술과 건축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기게 되고 인도네시아 군도 전역으로 마자파힛의 문화가 퍼져 나가게 된다.
(part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