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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ke Dec 30. 2021

간단히 정리하는 인도네시아 역사2

중세사

3. 상업시대: 1400-1700년

말루쿠 지역의 향신료 유럽과 중국 양쪽 모두에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13세기 인도네시아 군도를 중심으로 무역항로가 더욱 발달한. (명나라 정화의 원정이 1403년에서 1433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도 향신료를 찾기 위한 목적이 작지 않게 작용했).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 지역의 항구들은 이미 12세기부터 인도로부터 후추를 수입해서 중국으로 수출했었는데 같은 세기 자바에서 후추를 농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은 무역으로 더욱 번성하게 된다.  


13세기 혹은 14세기에는 불교가 지배적이었던 인도네시아 지역에 이슬람이 전래된다. 사실 아있는 비문의 기록은 11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의 이슬람은 거의 아랍과 남아시아의 상인들, 그리고 중국 푸젠성의 일부 이슬람 상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시작된다. 신앙 자체보다는 문화적인 이유로, 또한 상업적 유리함 때문에 인도네시아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다.


이후 주로 해안 중심으로 술탄국들이 세워지게 되는데 수마트라 북부의 아를 시작으로 말라카 해협 건너편의 말라카(믈라카), 필리핀 아래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동부의 말루쿠, 중부 자바의 드막, 서부 자바의 반뜬, 슐라웨시의 부똔과 마카사르 술탄국 등이 두 세기 이상에 걸쳐 차례로 세워지게 된다.


이어지는 식민시대 도래는 유럽 정치지형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상업에 있어서 이탈리아가 쇠퇴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부상하는데 이는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무역로가 오토만 제국에 의해 막힌 측면이 있다. 말루쿠제도의 향신료를 찾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의 중재에 의해 각각 다른 항로를 개척하는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말루쿠로 스페인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거쳐 역시 말루쿠로 향한다. 발견의 시대(대항해시대)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날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대서양과 지중해의 해수온도차 때문에 대항해시대 이전의 항해술로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의 상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범선이 발명되고 주요 무역항들이 오토만 제국에 의해 막히면서 무역의 패권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넘어다.


최초로 인도네시아 군도에 상륙했던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이어서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가 상륙하게 되는데 네 나라 모두 독점적인 향신료 무역을 원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네덜란드는 1595년 4월 네 척의 함선과 249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첫 번째 함대를 보내는데 그중 세척의 함선과 89명의 선원이 2년 후 암스테르담으로 복귀하게 된다.


항해는 300%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로 인해 고무된 네덜란드 위험을 줄이고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고자 최초의 주식회사로 알려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United East India Company, the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or VOC)를 1602년 설립한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 등과 차별화되었던 점은 다른 회사의 투자자들이 각 항해에 투자하던 것에 해 VOC는 각각의 항해가 아닌 회사에 투자함으로 개별 항해 실패에 대한 위험을 분산했다는 것에 있다. VOC는 포르투갈이 먼저 점령했던 말루쿠의 암본에 기지를 세우는데 이는 후발주자로서 재빠르게 유럽에서 인도, 중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네덜란드는 무역 네트워크 자체의 수익성과 더불어 향료 무역에 선봉에 서고자 하는 욕망 또한 가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측에는 향료와 바꿀 수 있는 곡물이나 의류 등의 산물이 없었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를 위해 자바 서부의 반뜬을 주목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우려해 현재의 자카르타 지역에 바타비아(Batavia)를 건설하게 된다. 영국뿐 아니라 자바의 마타람 왕국도 VOC를 견제하게 되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지만 보급 문제와 해군력의 차이로 바타비아를 함락시키지 못한다. 이미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VOC는 이제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해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말루쿠의 암본을 중심으로 한 향료 무역을 독점하게 된  VOC는 인도네시아 군도 내의 술탄국들과 다른 유럽 세력들과 대립하는데 특히 마카사르 술탄국의 원정에 어려움을 겪자 주요 두 종족인 마카사르족과 부기스족 중 부기스와 연합하여 마카사르를 패퇴시킨다.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VOC)를 앞세워 인도네시아 군도에 정착하는 동안 마자파힛 제국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힌두 왕국이던 마자빠힛은 그동안 이 지역 무역로를 독점하고 있었는데 향신료 수요의 증가로 라이벌(술탄국)들이 생겨난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군도 내의 술탄국들은 이슬람과의 연합으로 마자파힛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중 자바 서북부의 드막(Demak) 술탄국의 확장으로 마자파힛 제국1572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드막 술탄국은 자바 중부 마타람 지역에서 일어난 마타람 술탄국에 영향력을 빼앗기게 되는데 이는 이전 (불교-힌두) 마타람 왕국과는 다른 국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드막과 마타람 모두 자신들이 마자파힛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과의 관련성 속에서 확장되던 이슬람은 이제 수도자 그룹인 수피(Sufi)를 통해 내륙으로도 전파된다. 마자빠힛과 드막 이후 주도권을 잡았던 마타람 술탄국은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뺏기고 욕야카르타 왕국과 수르까르따 왕국으로 나눠졌다가 사라지게 된다. (현재 욕야카르타에 있는 왕국은 이미 사라진 왕국의 왕자가 가장 먼저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에서 선봉에 선 공로로 공화국 속 왕국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4. 경제, 정치의 쇠퇴: 1600-1800년

17세기가 되기 전 인도네시아는 이미 무역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는데 국제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고 인구도 정체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가운데 중국과 일본 또한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도와의 무역을 예로 들면 당시 수마트라의 후추와 인도의 면화가 교환 품목이었는데 인도 정세의 불안은 면화의 값을 올리는 동시에 품질을 낮추는 문제가 발생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수마트라와 자바에서는 후추 농사를 중단하고 대신에 면화를 경작하기에 이른다. 상업의 시대를 주름잡던 인도네시아 군도의 거대도시들은 이제 지역적 규모로 줄어들었고 경제적 수치들은 대부분 낮아지게 된다.


사실 여기엔 인도네시아 군도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화된 영향 또한 큰데 마자빠힛 여러 술탄국들이 무너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측면이  것이다. 이 상황에서 승자는 VOC와 중국 상인들뿐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마타람의 바타비아 공격을 막아낸 후 확장을 거듭하는데 바타비아(자카르타) 정착지의 인구는 1673년 27,000명에 이른다. VOC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토지를 분양했는데 중국인도 그중 3,000명이나 되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VOC는 바타비아(Batavia)에 아시아본부를 두고 있었다. 이는 서부의

 인도로부터 동부의 중국과 일본까지를 관할하는 거대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 1780-1784)의 여파로 회사는 항만시설을 비롯해서 자산의 70%를 잃게 된다. 승리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9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던 것에 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설립 이백 년 만인 1799년 해산하게 된다.


5. 제국의 성립: 1800-1900년

이제 VOC의 해산과 함께 네덜란드는 직접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군도내에서 다 서구 열강과 인도네시아 국가들(주로 술탄국)과 경쟁하던 네덜란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티모르를 제외하면 인도네시아 군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Luise)가 1806년 네덜란드의 왕좌에 올랐고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헤르만 다엔델스(Herman Daendels)를 동인도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지역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 원했기 때문에 4,000-18,000명의 용병을 모집했고 자바 북부에 군의 이동을 위한 도로를 닦았다. 영국의 해상봉쇄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요새도 만들었 1810년에는 네덜란드에 반기를 든 족자카르타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811년 네덜란드의 식민지 본부 바타비아는 영국에 의해 함락된다.

      

영국은 싱가포르의 개척자로 유명한 토마스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를 동인도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네덜란드가 독립하게 되고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 다시 동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해서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다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지배권이 바뀌는 동안 인도네시아 군도는 과중한 세금을 부과받는다. 인구는 급격히 늘었고 식량은 부족했으며 이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바뀌는 불안한 시기 가운데서 소위 자바 전쟁(Java War, 1825-1830)이 일어난다. 이 전쟁을 통해 20만 명의 자바인과 8천 명의 네덜란드 군이 전사했다. 족자카르타 왕가의 일족인 디포네고로(Diponegoro)가 전쟁에서 자바 측의 큰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사로잡혔고 이제 자바는 완전히 식민지화된다.


아쩨 역시 외교적인 노력과 더불어 극렬한 저항을 했는데 결국 1873년 3,000명의 군대가 아쩨에 침공해서 술탄의 궁전으로 진격한다. 이후 30년간의 전쟁에서 네덜란드군은 15,000명가량이 전사하고 아쩨군은 25,000명가량이 전사한다. 결국 1903년 네덜란드는 아쩨를 점령한다.

  

역시 발리로도 네덜란드군은 진격했는데 술탄국들에 밀려 발리까지 퇴각한 힌두 왕국의 후예들은 기품이 있는 왕가였다. 1906년 네덜란드군이 오늘날의 사누르 해변에 상륙하여 덴 파사르로 진격했다. 발리의 바둥왕과 그 가족, 신하들은 마치 자결하는 것과 같이 네덜란드군의 총기를 향해 차례로 행진했다. 그날 만명이 죽었고 2년 후 다시 300명이 죽었다. 이를 발리어로 뿌뿌딴(Puputan)이라고 하는데 Mass Ritual Suicide(집단적제의희생?)이라는 의미이다.

    

긴 시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네덜란드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그 중간에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도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인도네시아의 왕국(발리 등을 제외하면 주로 술탄국)들이 공존하는 형태였는데 20세기 즈음에는 그렇게 인도네시아의 모든 국가(states)들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part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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