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정리하는 인도네시아 역사3
근현대사(사진은 pixabay free image)
*책의 분량 때문에 배경 및 고대사/중세사/근현대사로 나눠서, Colin Brown의 A Short History of Indonesia를 간단히 발췌/번역/요약했지만 브런치에 올리기에는 글이 약간 길고 시대 구분이 딱 맞지는 않는다. 편의상 나눈 것이고 책의 순서는 넘버링된 숫자와 제목을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라며 실제 책에서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가 태동하는 6장부터의 분량이 전체의 반 이상이지만 비교적 최근의 정치사적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후반부를 적게 발췌한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6. 변화의 시대: 1900-1945년
20세기에 접어들었을 때,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직할 식민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는 서부의 수마트라로부터 동부 뉴기니 섬의 서쪽 절반까지를 장악했으며 지역 국가(자바 등지의 술탄국들과 발리의 힌두 왕국)들도 다 소멸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은 네덜란드의 상황과 국제정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체성 형성 등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네덜란드는 1901년 기독교 우파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부의 통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네덜란드의 여왕은 "윤리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소위 윤리정책(Ethical Policy)을 시행한다. 이는 분명 제국주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인도네시아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복지가 향상된 측면이 있다. 특히 초등교육을 중심으로 정식 교육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민중들 사이에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8년의 한 학생대회에서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과 말레이시아 남부 지역에서 쓰이던 지역 언어였던 말레이어(주로 해안 무역로를 중심으로 교역어로 쓰이고 있었다.)를 인도네시아의 국어로 사용하자는 결의가 있었다. 20세기 초반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33종이나 되는 신문이 발행됐고 1920년대부터는 현대 인도네시아 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반둥공대와 현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전신인 네덜란드 정부에서 설립한 전문교육기관들이 그것이다. (독립전쟁 시 민족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족자카르타에 설립된 국립대학인 가자마다대학교(UGM)가 공식적인 최초의 정규대학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이슬람 진영에서도 고등교육기관들을 설립하는데 이는 네덜란드 식민 제국주의자들의 기독교식 교육에 대한 반발이었다. 모더니스트 이슬람 단체인 무함마디야(Muhammadiyah)와 정통주의 이슬람 단체인 엔우(Nahdatul Ulama, NU)가 이를 주도하는데 특히 NU의 수장 중에는 인도네시아의 제4대 대통령인 와히드(Wahid)와 현 부통령인 아민(Amin)도 있다.
이 시기 개화된 인도네시아의 엘리트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정치 조직화된다. 그중에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와 초대 부통령인 하타도 있었다.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수라바야의 중등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많은 독서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에 따른 정치적인 관심이 시작된다. 이후 수카르노는 반둥공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한다. 1920년대에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에 있던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는데 그 목적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이었다. 수카르노는 속해있던 정당인 PNI(Perserikatan Nasional Indonesia, 스터디클럽에서 시작되어 협회를 거쳐 정당으로 변화)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막시즘과는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PNI는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첫 번째 주요 정당이었는데 인도네시아의 독립이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지닌 여러 단체(정당)와의 연합을 통해 수카르노와 PNI는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하타 역시 네덜란드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PI(Perhimpunan Indonesia)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이후 네덜란드에 의해 수카르노가 체포되는데 남아있던 PNI의 리더들은 방향성을 잃고 그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후 또 다른 PNI(Pendidikan Nasional Indonesia)가 생겨나는데 이는 네덜란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하타 또한 가입한다. New PNI를 이끌던 Sjahrir와 Hatta는 이전 PNI의 문제는 구성원들의 함량 미달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PNI는 같은 잘못을 피하고자 훈련된 수준임이 증명된 이들만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수카르노가 출소하면서 Partindo를 이끌게 된다. 1931년 보수적인 총독인 드 종(de Jonge)이 임명되고 1929년 월스트리트에서 촉발된 대공황의 여파가 1931-1932년 사이에 인도네시아에 미치자 nationalist movement에도 더 큰 위협이 가해졌다. 1934년 수카르노는 플로레스 섬으로 귀양을 가고 PNI처럼 Partindo 역시 와해된다. 하타 역시 비슷한 시기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독립을 열망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났고 각자의 자리에서 준비와 연대가 이루어진다. 그러던 중 유럽의 전쟁이 동인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독일이 1940년 5월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또한 1942년 1월에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자바와 수마트라를 점령하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침공하지만 이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통해 1949년 완벽한 독립을 이루게 된다.
7. 혁명에서 권위주의 통치의 시대로: 1945-1957년
한반도가 독립을 경험하면서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것처럼 인도네시아 역시 정국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을 하고 수카르노가 대통령에 하타가 부통령에 임명됐는데(자카르타 국제공항의 이름이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이다.) 여전히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국가가 될 것인지 세속국가가 될 것인지에 대한 입장차가 있었다.
일본이 연합국에 패배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인도네시아의 서부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영향력이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일본 세력을 몰아내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상륙한 후 다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을 보였다. 수카르노와 하타를 투옥시키기도 하고 일종의 괴뢰정부인 공화국 정부(the Republican government)를 세우기도 했으며 이후엔 서 뉴기니를 점령하여 네덜란드령 뉴기니로 편입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미국의 개입으로 최종적으로 좌절된다.
새로 세워진 인도네시아 정부가 마주한 또 다른 위협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의 대립이었다. 다룰 이슬람(Darul Islam)과 같은 단체는 인도네시아가 샤리아 법을 따르는 이슬람 국가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긴 시간 무장투쟁을 이어간다. 파푸아 등 동부의 기독교 지역의 독립 움직임 때문에 수카르노는 빠른 시기 세속국가로의 방향을 정하고 다룰 이슬람을 진압한다.
8. (빤짜실라) 교도 민주주의 시대: 1956-1998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와 다음 대통령인 수하르토는 한국의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과 닮은 부분이 있다. 수카르노의 경우 가장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였지만 독재자가 되었다는 점과 수하르토의 경우 군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것과 그의 부패와는 별개로 그의 집권 기간 경제가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수카르노는 반서구적인 인물이어서 공산주의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의 집권 시기 인도네시아 내에 상당수의 공산당원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공산주의자들이 군부의 장성들을 하룻밤 사이에 살해한 사건 가운데 살아난 후 역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극심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집권 시기 약 백만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었다.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당시 위험을 피하고자 많은 공산당원들이 개신교로 전향하기도 했고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개신교, 가톨릭, 힌두교, 유교, 불교의 여섯 개 종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무신론이 금지된 국가가 되었다.
빤짜실라는 현대 인도네시아의 5가지 국가 통치이념이다. 그 첫 번째 문장이 유일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문장이며 수카르노는 유일한 하나님이 오직 이슬람의 알라여야 한다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을 좌절시키며 인도네시아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교도(Guided)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일종의 독재로 나아가게 된다.
수카르노의 시대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시대가 끝나갈 때는 공산주의자들과 군부로부터의 압력이 상당했다. 처음 교도 민주주의 시기엔 군부의 힘이 더 컸는데 이제 1963년부터는 그 힘이 군부에서 수카르노의 정당인 PKI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제 군부와 PKI의 갈등이 인도네시아 정치에 있어 주요 의제가 되었는데 1965년 9월 31일에서 10월 1일 사이 PKI당과 관련된 청년들이 6명의 고위 장성들을 납치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략사령관이던 수하르토는 당시 죽음을 피했는데 그는 즉시 정예군을 데리고 자카르타를 접수한다. 빠르게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이른바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New order era)가 시작된다. 수하르토는 1968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택연금상태의 수카르노는 1970년 사망한다.
이슬람의 엔우와 학생들을 비롯한 시위대가 반대 집회를 하곤 했는데 수하르토는 강하게 이를 억지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전시기의 위협이었는데 수하르토는 공산주의자들은 전부 처단하고 이슬람주의자들 효과적으로 억누르게 된다.
9. 수하르토 이후 시대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경제위기(IMF사태)가 인도네시아에도 닥친다. 인도네시아로서는 더욱 심한 충격이었는데 몇 가지 이유를 보자면 1990년대 인도네시아는 달러 대비 루피아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았었고 수출경쟁력이 약했으며 수출이 한국과 일본에 종속된 측면도 있었다. 두 나라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도네시아의 어려움도 가중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제적으로 탄탄했기에 국민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독재자 수하르토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998년 초반부턴 경제위기가 더 심화됐고 수하르토에 대항하는 학생주도의 시위가 주요 도시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1998년 5월에는 시위 중에 대학생 네 명이 군이 발포한 총에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쇼핑몰 등에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과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는데 당시 1200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의 여성이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로 수하르토는 사임하고 부통령인 하비비(B.J. Habibie)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part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