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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호랑이 Jul 24. 2017

대표의 일침


자책하는 날들이 반복됐고, 권 과장은 결국 L팀으로 가게 되었다. 발령 바로 전 날 인사이동 발표가 났기 때문에 제대로 환송회도 하지 못한 채 떠났다.


H팀에는 다른 부서에 있던 채 과장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종종 H팀에 들러 강 팀장에게 안부 인사를 묻고 가는 붙임성 좋은 사람이었다. 신입은 그나마 사람 좋아 보이는 채 과장이 권 과장 대신 팀에 들어오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채 과장은 벤츠 마크가 새겨진 커버를 씌운 PC 태블릿을 항상 손에 들고 다녔다. 회의, 보고, 업무전달 등 언제 어디서나 태블릿을 꺼내 바로 처리했다. IT에 정보가 밝았고 스포츠, 자동차, 주식 등 두루두루 관심이 많은 부지런한 사람 같아 보였다. 특히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어 년간 계획을 수립할 때엔 템플렛을 팀에게 공유하여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조직개편 이후 첫 대표 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180cm가 넘는 권 과장이 서 있던 자리에 키가 작고 단단해 보이는 채 과장이 서 있었다. 권 과장에게 겉으로는 혹독하게 대하지만 오랜 기간 회사에 헌신한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고 있는 대표가 한마디 했다.

"그래, 결국 권 과장은 다른 팀으로 갔구만. 거물이 빠져나가서 강 팀장 섭섭하겠어. 채 과장, 새 부서에 적응하는 데 3개월 정도 주면 되겠나?"

채 과장은 준비라도 한듯 재빨리 대답했다.

"네! 권 과장에게 인수인계 받고 최대한 빨리 팀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런데 말야..."


대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팀원들을 차례대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본인이 출근하고 무슨 일 하고 있는지 기록은 하고 있나? 강 대리, 자네는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어떤 업무를 했는지 한 시간 단위로 나한테 설명해줄 수 있나?"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이 했는지 생각해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신입은 멘붕에 빠졌다.

'내가 오늘 무슨 일 했더라? 분명 정신 없이 바빴는데 딱 집어서 무슨 일을 했다고 할 만한건 없네. 수시로 들어오는 메일에 답장하고, 팀장님 부르시면 가서 홍콩 매니저한테 보내는 메일 작성하는거 도와드리고, 인터뷰 한거 보고서 작성하고, 인감 찍어야 되는거 스캔해서 도장 찍고... 잔 업무만 해서 딱히 말씀 드릴 업무가 하나도 없네.'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강 대리와 다른 팀원들에게 대표가 따끔한 일침을 던졌다.

"여러분 중에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점심 뭐 먹을지 메뉴 고민하고, 퇴근 시간까지 시계 들여다보면서 시간만 떼우고 있짐 않느냐 말입니다. 업무는 1시간 단위로 무조건 체크를 하십시오. 오늘 회사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이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갑작스런 대표의 호통에 팀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강 팀장이 바람 쐬러 나간 사이 다들 한마디씩 했다.

"아니, 어떻게 업무를 1시간 단위로 체크를 한다는거야?"

"그러게 말이예요. 수시로 날라오는 업무 쳐내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매 시간 기록하고 보고할 수 있어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돼요?"


신입은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오늘 대표가 말한 내용 하나하나가 자신을 겨냥해서 한 것처럼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자책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스킬만 늘어가고 있었다. 오후 4시부터는 10분 단위로 시계를 들여다 보며 퇴근을 기다리는 자신을 대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대표의 일침에 불만을 토로하는 팀원들에게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신입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1장. 적응기

자기소개

첫 출근

센스가 필요해

달콤한 행복

월요일

언니의 조언

닮고 싶은 그녀

정리의 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


2장. 권태기

심상치 않은 기류

낙동강 오리알

일 안한다고 소문 났어?

대표의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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