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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호랑이 Sep 26. 2016

104 유로 호텔에서의 첫날밤

유럽여행의 첫사랑, 체코


04.

프라하 공항에 도착하시면 입국장에서 저희 운전기사가 고객님의 성함과 회사 로고가 새겨진 주황색 카드를 들고 있을 겁니다.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어떤 예상치 못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저희는 고객님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프라하 공항택시 안내 메일


저녁 11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프라하 공항. 숙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메일을 확인하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입국장을 빠져나가자 회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 이름이 적힌 주황색 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출처 : 프라하 공항택시 홈페이지

"Hi~!"

인천 공항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Chicken or beef?"라는 승무원의 질문에 "Beef!"라고 대답한 것 외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한껏 흥분되어 있는 나를 보고 한 번 씨익 웃더니 캐리어를 받아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자동문이 열리고 드디어 프라하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진짜 프라하에 왔구나, 프라하에 왔어.'

쓰흡 ! 하아-

신선한 프라하 밤공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요란하게 소리 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운전기사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듣기 힘든 영어 발음으로 가볼만한 곳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내릴 때 지불해야 하는 현금 550 코루나를 손에 꼭 쥔 채 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차창 밖 프라하 밤 풍경에 빠져 있었다. 그때 느낀 설렘은 몸이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어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면 세상에 처음 눈 뜬 사람처럼 창밖을 구경하던 택시 안의 나로 돌아가는 듯하다.



05.

유럽여행 통틀어 가장 비싸게 묵은 호텔에 도착했다. 104 유로. 보통 20~30 유로 호스텔에서 묵었으니, 3~4일 치 숙박비를 한 방에 써버린 거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밤늦게 도착해서 아침 일찍 나갈 건데 왜 이렇게 비싼 호텔을 예약한 거야.'

애꿎은 남자친구를 탓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쓸쓸하고 황홀한 첫날 밤을 지낸 불켜진 방


운전기사는 호텔 입구까지 캐리어를 가져다 주었다. 팁은 얼마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Have a good trip!"이라는 말만 남기고 택시로 돌아갔다. 이제부턴 진짜 혼자였다.

키보다 훨씬 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비가 있어야 할 곳에 바텐더가 컵을 닦고 있는 BAR가 나왔다.

'웬 BAR? 로비는 어디, 설마 잘못 내려준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40대로 보이는 남자 매니저가 밖으로 나왔다.

"혹시 호텔 찾고 있니? 호텔로 들어가는 문은 밖으로 나가서 왼쪽에 있어."

"아, 땡큐"

낯선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밖으로 나오니, 택시가 출발하지 않고 내려준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헉, 왜 안 가고 서있는 거야. 설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자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이 나오는 영화 <테이큰>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치며 덜컥 겁이 나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레게 머리를 땋은 젊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 RESIDENCE U TRI BUB NU에 온 거 맞니?"

불안한 마음에 뒤를 힐끔거리며 그가 묻는 말에 대답했다. 결제를 마친 뒤 3층으로 올라가 기다란 호실 번호가 달린 열쇠로 문을 여니, 네 명은 거뜬히 잘 수 있을 정도로 큰 방이 있었다. 문이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한 뒤, 커튼을 살짝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길가에 세워진 공항 택시가 시동을 켜더니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간 건가? 고마운 사람한테 괜히 오해했네.'

그제야 안전한 곳에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면서 호텔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비싼 호텔 예약했다고 원망했던 건 까맣게 잊은 채 호들갑을 떨며 톡을 날렸다.

- 여기 혼자 있기 너무 아까워. 다음엔 꼭 같이 오자.



06.

자정이 넘은 새벽,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프라하 지도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휑한 거리에 혼자 있으니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바로 숙소를 향해 전력질주할 생각을 하며 구시가 광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홀로 걸으니 운치있는 가로등도 음침하고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사진 찍으며 밤거리를 감상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언제든지 숙소로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또다시 감상에 젖었다.

'내가 진짜 프라하에 와있구나. 너무 황홀하면서 미치도록 외롭다.'

그렇게 창가에 기대어 하늘이 검은색에서 하늘색으로 변할 때까지 프라하의 거리를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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