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의 첫사랑, 체코
01.
유리문 밖에 세워져 있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손에는 남자친구가 챙겨준 약봉지가 들려 있었고, 바스락거리는 봉지 소리에 한국을 떠나기 싫다는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행장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고 있으니 혼자 떠나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대한 설렘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보라색 보조 가방에 달아놓은 싸구려 자물쇠는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고장이 나버렸고,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구의 백인 남성이 나의 왼쪽 팔걸이를 모두 차지하고 앉았다. 영화 <와일드>를 보고 있는데 주인공 백팩에 비해 내 캐리어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이다. 순간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90%의 설렘과 10%의 두려움은 순식간에 99%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어느새 나는 비행기가 착륙하지 않기를, 스키장 리프트가 회전해서 다시 산 밑으로 돌아가듯이 이 비행기도 곧바로 회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02.
경유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표지판을 따라 다음 비행기 타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옆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하나투어 A조 이쪽으로 모이세요~!" 깃발을 들고 있는 가이드 중심으로 15명 정도 되는 한국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것을 지켜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돈 낼 테니 나도 끼워달라고 부탁할까? 한국어로 대화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환승 장소를 찾아 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03.
난생처음 보는 러시아 문자가 신기했고 마피아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건강한 체격의 러시아 사람들의 모습에 움찔움찔했다. 겨우 찾은 와이파이존에서 남자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 나 모스크바에 도착했어.
동시에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떴다. 프라하에서 첫날 묵기로 한 호스텔 예약이 취소됐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영화 <터미널>이 생각났다. 아, 첫날은 프라하 공항에서 노숙해야겠구나. 도착하자마자 공항 직원한테 부탁해서 안전하게 잘 곳부터 찾아야겠다. 너무 당황하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노숙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멘붕에 빠져 있는 나를 대신해 남자친구가 새로운 숙소와 픽업 택시까지 예약해주었다.
모스크바에서 체코로 가는 비행기 안, 동양인 여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니 외국인들이 뒤돌아 보며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도 잠시, 18시간 동안 느꼈던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정신을 잃다시피 단잠에 빠졌다. 기내식을 먹기 위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빼고는 내리 잠만 자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비행기가 체코 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