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마가, 알렉산드리아의 문을 두드리다

2천 년 사막의 신앙, 이집트 콥트 정교회 이야기

by 청연

이집트로 향한 마가


서기 42년, 한 유대인이 이집트 땅을 밟았다. ¹


그의 이름은 요한 마가(John Mark). 마가의 다락방(사도행전 12:12), 바로 그 공간의 주인. 신약성경 4 복음서 중 하나인 '마가복음'의 저자. 그가 향한 곳은 알렉산드리아—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지중해 최대의 항구 도시였다.


왜 하필 이집트였을까?


리비아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라다


마가는 이집트인이 아니었다. 그는 리비아 동부 펜타폴리스(Pentapolis, '다섯 도시'라는 뜻)의 키레네(Cyrene) 근처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당시 북아프리카 해안에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정착한 유대인 공동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마가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가의 유년 시절, 리비아 내륙의 유목 부족들이 해안 도시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콥트 전승은 이들을 '야만인(barbaroi)'이라 기록한다. 약탈과 폭력이 잦아지자 마가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팔레스타인으로 피난했다.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이 피난이 마가의 인생을 바꾸었다.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직접 목격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초대 교회 신자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마르코스(Μᾶρκος, 마가)라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가니, 그곳에 많은 이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2:12, 헬라어 성경 직역)


사도행전이 기록한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그곳이다. ² 최후의 만찬이 열린 장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장소로 전해지는 그 다락방 말이다.


베드로의 입, 그리스도의 펜


마가는 누구였을까?


성경은 그의 직업을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황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120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집, 그리고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응답하러 나온 하녀.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니, 로데라는 이름의 파이디스케(παιδίσκη, 여종/하녀)가 응답하러 왔다" (사도행전 12:13, 헬라어 성경 직역)


그의 가문은 분명 재력이 있었다. 콥트 전승은 그의 가문을 레위 지파, 즉 제사장 계열과 연결 짓는다. ³


리비아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로마에서도 활동한 마가는 그리스어, 히브리어(아람어), 라틴어를 넘나드는 다국어 구사자였을 것이다. 2세기 초 교부(敎父, Church Fathers)⁴ 파피아스(Papias)는 그를 '베드로의 통역관(ἑρμηνευτής)'이라 불렀다. 아람어를 주로 쓰던 베드로가 그리스어(헬라어)권에서 설교할 때, 마가가 그 말을 옮기고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 기록이 바로 마가복음이다. 그 기록이 바로 마가복음이다.


그는 베드로의 입이 되어 언어의 장벽을 넘었고, 펜을 들어 그리스도의 생애를 최초로 기록한 지성인이었다.⁵


960px-Leone_marciano_andante_-_Vittore_Carpaccio_-_Google_Cultural_Institute.jpg?20150125020439 《성 마가의 사자》, 비토레 카르파초, 1516

날개 달린 사자가 앞발은 육지에, 뒷발은 바다에 딛고 서서 복음서를 펼쳐 들고 있다. 책에는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평화가 너와 함께하리라, 나의 복음사가 마가여)"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혀 있다. 사자는 마가복음의 상징이자, 복음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사자의 포효에 비유한 데서 유래한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떠났던 자, 다시 길을 찾다


그러나 마가의 여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그런데 소아시아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그는 갑자기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울과 그 일행이 바포(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3:13, 헬라어 성경 직역)


성경은 그가 왜 떠났는지 밝히지 않는다. 험난한 여정을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바울 중심으로 재편되는 사역 구조에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 일은 훗날 큰 갈등으로 번졌다. 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바나바가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을 때, 바울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파록시스모스, παροξυσμός)이 일어나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사도행전 15:39, 헬라어 성경 직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 구브로(키프로스)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다른 길을 택했다. 초대 교회의 두 지도자가 갈라선 것이다.


마가에게는 뼈아픈 실패였다. 그러나 이 실패가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는 베드로 곁에서 다시 일어섰고, 베드로의 통역관이자 기록자로 단련되었다.⁶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사명을 찾아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세계의 교차로, 알렉산드리아


지성인에게 어울리는 지성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Philip_Galle_-_Lighthouse_of_Alexandria_%28Pharos_of_Alexandria%29_-_1572.jpg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필립 할러, 1572

기원전 280년경 완공된 파로스 등대. 높이 약 100~130m로 추정되며,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꼭대기의 불빛은 50km 밖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전해진다. 14세기 지진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마가가 도착할 무렵 이미 400년 된 국제 도시였다. 그리고 불과 70여 년 전까지 이곳은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수도였다. 기원전 30년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3천 년 파라오 왕조는 막을 내렸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파라오의 후예들은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 70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대도서관, 그리고 지중해 전역에서 몰려든 상인과 학자들. 그리스 철학과 이집트 신비주의, 유대 율법이 한 거리에서 뒤섞이는 곳이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는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1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 전역에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고, 그 중심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⁷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이 바로 이 도시에서 탄생했다.


960px-Ptoleme_2_by_Jean-Baptiste_de_Champaigne.jpg?20101117213029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장바티스트 드 샹페뉴, 17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70인역(Septuagint) 번역을 지시하는 장면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를 초빙해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기게 했다. 이 번역본은 훗날 초대 교회가 사용한 구약성경이 되었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게다가 알렉산드리아는 고향 키레네에서 뱃길로 며칠이면 닿는 거리였다. 같은 언어, 같은 지중해 문화권. 마가에게 이곳은 낯선 땅이 아니었다. 유대인이면서 그리스어를 쓰고, 이집트 땅에 사는 사람들—마가와 같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이보다 완벽한 선교지가 또 있었을까.


신발 수선공 아니아누스


콥트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첫날 그의 신발 끈이 끊어졌다. 그는 가까운 수선공을 찾았고, 거기서 아니아누스(Anianus)라는 장인을 만났다.


아니아누스가 송곳으로 가죽을 꿰매다 그만 자기 손을 찔렀다. 피가 흘렀다. 그가 고통 속에 외쳤다.


"헤이스 호 테오스(Heis ho Theos)!"—"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마가의 귀가 번쩍 뜨였다. 당시 이집트는 오시리스, 이시스, 그리고 태양신 라(Ra)를 섬기는 다신교의 땅이었다. 그런데 이 장인의 입에서 '한 분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우연히 내뱉은 감탄사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가에게 그것은 대화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복음을 전할 접점이 생긴 것이다.


마가는 진흙을 손에 묻혀 아니아누스의 상처에 발랐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포했다. 상처가 나았다. 놀란 아니아누스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마가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부른 그 한 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선교의 첫 대화였다.


Cima_da_conegliano%2C_guarigione_di_anania.jpg 《아니아누스의 치유》, 치마 다 코넬리아노(Cima da Conegliano), 1497-99년경

마가가 송곳에 찔린 아니아누스의 손을 치유하는 장면. 베니스 화가답게 건물은 이탈리아풍이고, 인물들은 맘루크 스타일의 동방 복장을 입고 있다. 역사적 고증보다 이국적 분위기를 강조한 르네상스 특유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니아누스는 마가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뒤따랐다. 마가가 순교한 뒤, 바로 이 신발 수선공이 알렉산드리아의 두 번째 총대주교가 된다.


아프리카 최초의 교회, 부콜리아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첫 신자들을 얻은 뒤 한동안 로마와 고향 펜타폴리스를 오가며 선교했다. 콥트 교회는 이 고향 선교를 중요하게 기록한다. 오늘날에도 콥트 정교회 총대주교의 공식 칭호에는 "알렉산드리아와 펜타폴리스의 교황"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⁸


그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것은 서기 65년경. 그 사이 신자들의 수는 크게 늘어 있었다.


마가가 떠나 있는 동안 신자들은 스스로 교회를 세웠다. 장소는 알렉산드리아 동쪽 교외, '부콜리아(Baucalis)'라 불리는 해안 절벽 지대—'부콜루'라는 바위 언덕 아래,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마가가 돌아왔을 때 이미 "상당한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 카타콤에 숨어 예배드릴 때,⁹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부콜리아 언덕 위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다.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였다.


이 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뿐 아니라 그리스인, 그리고 토착 이집트인들까지 복음을 받아들였다.


Gentile_and_Giovanni_Bellini_—_Saint_Mark_Preaching_in_Alexandria.jpg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가》, 젠틸레 벨리니 & 조반니 벨리니, 1504-1507년경

마가가 알렉산드리아 광장에서 이집트인,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이 뒤섞인 군중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배경에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대성당과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카이로의 이븐 툴룬 모스크 첨탑이 혼합되어 있다—베니스 화가들이 상상한 '동방의 도시'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가는 이들을 위해 전례를 정비하고, 신자들을 가르칠 교육 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콥트 교회는 이 기관을 자신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 중 하나로 여긴다. ¹⁰ 훗날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 of Alexandria)'로 발전한 이 학교는 2세기 후반 판타이누스(Pantaenus)가 초대 학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신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를 클레멘스(Clement), 오리게네스(Origen)가 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융합한 이들의 신학은 초대교회 사상의 토대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독교 세계의 지성 수도로 떠올랐다.


순교, 콥트 교회의 시작


서기 68년,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 축제일이었다.


세라피스(Serapis) ¹¹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을 하나로 묶기 위해 창안한 혼합 신으로,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그리스의 제우스를 결합한 존재였다.


《세라피스가 그려진 삼련화(三連畫, triptych_세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그림) 패널(일부)》

서기 100-200년경 로마령 이집트 작품으로, 성숙한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된 세라피스는 제우스나 유피테르 같은 그리스-로마 신들과 외모가 유사하다. 머리 위의 양식화된 '모디우스(곡물 바구니)'는 풍요의 신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동시에 저승 세계의 지배자 하데스와도 연결된다. ⓒ Google Art Project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Serapeum) 신전은 대도서관과 함께 이 도시의 상징이었고, 매년 열리는 축제에는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이교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다. 유일신을 믿는 그들에게 다른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이 거부가 이집트 다신교 신자들의 분노를 샀다. 폭도들이 마가를 붙잡았다.


저작권 표시필요. 2560px-Casa_degli_Amorini_Dorati._Fresco._09.jpeg 폼페이 '황금 큐피드의 집(Casa degli Amorini Dorati)', 세라피스 프레스코, 서기 79년경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히기 전 로마 가정에서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처럼 풍성한 수염과 곱슬머리를 가졌으며, 머리 위에 '모디우스(곡물 바구니)'를 얹고 있다. 마가가 순교할 당시(6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숭배되던 세라피스의 모습과 거의 동시대 작품이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들은 마가의 목에 밧줄을 묶고 알렉산드리아의 돌바닥 위로 끌고 다녔다. 이틀에 걸친 고문 끝에 마가는 숨을 거두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960px-Angelico%2C_linaioli_tabernacle_05.jpg?20090712095757 《성 마가 복음사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33년

리나이우올리 삼련화(Linaioli Tabernacle)의 외부 문짝에 그려진 마가의 초상이다. 마가는 복음서를 든 채 당당히 서 있으며, 발아래에는 그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리나이우올리(아마포 직조공 조합)가 자신들의 수호성인 마가를 기리기 위해 주문한 작품으로, 초기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꼽힌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남긴 마지막 말(누가복음 23:46)과 같았다. 한때 선교 현장을 떠났던 청년은, 끝내 스승의 죽음까지 닮아가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신자들이 수습하여 알렉산드리아 동쪽 부콜리아(Baucalis) 지역에 안장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작은 경당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성당의 시초가 된다. '콥트(Copt)'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Aigyptos)', 곧 '이집트'에서 왔다. 콥트 교회는 문자 그대로 '이집트 교회'였다. 오늘날 콥트 정교회의 수장은 여전히 "알렉산드리아와 온 아프리카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500px-Jacopo_Tintoretto_-_St_Mark%27s_Body_Brought_to_Venice.jpg?20240416191146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성 마가의 유해》, 야코포 틴토레토, 1562-1566년경

서기 828년 이슬람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명의 베네치아 상인이 마가의 유해를 몰래 반출하는 장면이다. 당시 신생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로마(베드로, 바울)나 라이벌 아말피(안드레아)에 맞설 강력한 수호성인이 필요했고, 복음서 저자 마가야말로 완벽한 선택이었다. 그들은 돼지고기 아래 시신을 숨겨 무슬림 세관원의 검문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배경의 화염은 이교도들이 시신을 태우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실패한 순간을 암시한다. 베네치아는 이 유해를 모시고 산 마르코 대성당을 세워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콥트 교회는 마가의 머리가 알렉산드리아에 남았다고 전하며, 2천 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유해 일부를 콥트 교회에 반환했고, 오늘날 알렉산드리아 성 마가 대성당에는 마가의 유해 일부가 다시 안치되어 있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가에서 시작된 총대주교의 계보는 2천 년간 끊이지 않았다. 현재 제118대 총대주교 타와드로스 2세(Tawadros II)가 그 자리를 잇고 있다.


퍼브릭도메인P-5-03679a_cac848a0-e17f-4a52-a6dc-f69b3f7dc597 (1).jpg 《성 마가 교회, 알렉산드리아(St. Mark's Church, Alexandria)》,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 1846년

이 뉴스 삽화는 마가가 순교한 부콜리아(Baucalis) 지역 위에 세워진 성 마가 총대주교좌 성당의 19세기 당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알렉산드리아의 역사적 정취를 엿볼 수 있다. ⓒ Wikimedia Commons / Illustrated London News, Public Domain


우연일까, 섭리일까?


신발 끈 하나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아니아누스는 송곳에 손을 찌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가는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아프리카 대륙의 기독교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끊어진 신발끈 하나, 6,650km 나일강의 복음화.


파라오의 후예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2천 년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각주

1. 마가의 알렉산드리아 도착 연대는 신약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4세기 교회사학자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는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제2권 16장에서 "마가가 이집트에 파견되어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기록했으며, 이를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 3년(서기 43년경)과 연결짓는다. 콥트 정교회는 이 전승을 바탕으로 마가의 도착 시점을 서기 42~43년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일부 후대 전승은 61년을 언급하기도 하나, 유세비우스의 기록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증거다.


2. '다락방'은 한국 개신교 성경(개역개정)의 번역이고, 가톨릭 성경(공동번역)은 '위층 방'이라 옮긴다. 헬라어 원어 '휘페로온(ὑπερῷον)'은 건물의 상층에 위치한 넓은 방을 뜻하며, 한국 전통 가옥의 좁은 다락과는 다르다. 수십 명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상층 연회장으로, 마가의 가문이 예루살렘 이주 후에도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콥트 정교회 전승은 마가의 가문을 레위 지파(제사장 지파)와 연결짓는다. 이 때문에 콥트 성화에서 마가는 종종 제사장 의복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에 '수행원(휘페레테스, ὑπηρέτης)'으로 동행했는데(사도행전 13:5), 이는 단순한 짐꾼이 아니라 세례 준비와 공동체 행정을 담당하는 실무 조력자를 의미한다. 파피아스의 '베드로의 통역관' 기록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3권 39장에 인용되어 전한다.


4. 교부(敎父, Church Fathers)는 초대 교회 시대(1세기-8세기경)에 기독교 교리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자·주교·저술가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저작은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신앙의 증거로 여겨진다. 파피아스(약 60-130년경)는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로, 사도들의 직접 제자들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5. 신약성경의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이 현대 성서학계의 주류 견해다. 이를 '마가복음 우선설(Markan Priority)'이라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참조하여 작성되었다고 보며, 대략 서기 65-7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전통적으로 교회는 마태복음이 먼저라고 여겼으며, 이 견해를 유지하는 학자들도 있다.


6.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훗날 회복되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쓴 서신에서 마가를 다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르코스(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봉사(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에 유익하다"(디모데후서 4:11, 헬라어 성경 직역). 한때 사역 현장을 떠났던 청년이 바울에게조차 '유익한 일꾼'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7. Philo of Alexandria, In Flaccum, §6. 필로는 서기 38년 알렉산드리아 반유대 폭동을 기록하면서 이집트 유대인 인구를 약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이 수치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가 로마 시대 지중해 세계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8. 콥트 정교회 총대주교의 공식 칭호는 "알렉산드리아와 온 아프리카, 거룩한 사도적 보좌의 교황이자 총대주교(Pope and Patriarch of the Great City of Alexandria and all Africa on the Holy Apostolic Throne of Saint Mark the Evangelist)"이다. 역사적으로 "펜타폴리스"가 포함되기도 했으며, 이는 마가가 자신의 고향인 리비아 펜타폴리스 지역을 직접 선교했다는 전승에 근거한다.


9. 서기 64년 7월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 황제는 방화 책임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가하며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타키투스(Tacitus)의 『연대기(Annals)』 15권 44장이다. 타키투스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Christus)—이 이름의 기원이 된 자—는 티베리우스 치세에 우리 총독 중 한 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에 의해 극형(supplicium)에 처해졌다." 이 시기 로마의 신자들은 도시 외곽의 지하 묘지(카타콤, catacomb)에 숨어 예배를 드렸으며, 베드로와 바울도 이 박해 중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유세비우스, 『교회사』 II.25.5-8).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첫 박해는 마가 순교(68년)로 기록되나, 이는 국가 주도가 아닌 세라피스 신전 축제 중 이교도 군중에 의한 것이었다. 콥트 교회 역사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 신자들은 "카타콤에 숨지 않고 공개적으로 예배드렸다"고 전해진다.


10.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설립을 마가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콥트 교회 고유의 전승이다. 서방 학계에서는 2세기 후반 판타이누스를 실질적 창립자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나, 콥트 교회는 마가가 놓은 교육의 초석 위에 판타이누스가 학교를 체계화했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이 학교가 초대교회 신학의 산실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11. 세라피스는 그리스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풍성한 곱슬머리와 수염을 가진 장년 남성으로, 제우스나 하데스와 흡사했다. 머리 위에는 '모디우스(modius)'라 불리는 곡물 바구니를 얹고 있는데, 이는 풍요와 저승 세계의 지배를 동시에 상징했다. 타키투스는 『역사(Historiae)』 4권 83-84장에서 세라피스 신상의 기원을 기록했으며, 플루타르코스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De Iside et Osiride)』에서 세라피스를 오시리스의 그리스화된 형태로 해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에 안치된 세라피스 신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조각 중 하나였으며, 서기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참고 자료

Otto F.A. Meinardus, Two Thousand Years of Coptic Christianity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1999)

Aziz S. Atiya, A History of Eastern Christianity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8)

콥트 정교회 공식 웹사이트, "St. Mark the Apostle" (copticchurch.net)

Eusebius of Caesarea, Ecclesiastical History, Book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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