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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Dec 16. 2021

바라보고

셋넷 여행 이야기 30 : 2013 우리 앞이 모두 길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단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필리핀 파라냐께 시티 교도소 코스탈빌리지 빈곤지역

열악하기 짝이 없는 필리핀 마닐라의 교도소와 빈민촌을 방문한다. 매 순간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고 요리하고 목욕봉사를 했던 향이는, 그곳에서 고향 엄마를 그리워한다. 이런 참담한 곳에라도 엄마가 있다면 언제든 와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젖은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난다. 아득한 이국땅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향이의 눈망울이 깊고 푸르다. 문득 재작년 먼 곳으로 떠난 엄마가 사무친다.      


민도르섬 딸리빠난 해변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쿨하게 사는 셋넷 여행 대장 성표 샘이 놀랍다. 그 무엇도 위대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그가 낯설다. 20년 넘게 집요하게 남의 인생에 참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나는 혼란스럽다. 내가 고집했던 ‘대안교육과 대안적인 삶’이 뭐였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희망의 실체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시장 골목 선술집에서 필리핀 술 산미구엘이 선사한 대화가 가을 단풍처럼 번진다. 오랜 세월 셋넷과 함께 해온 자원교사 지은 샘이 나지막이 던진 말들이 그물처럼 사로잡는다. “당신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셋넷과 함께한 이들을 의심하지 마세요. 시험하려 하지 말아요.” 그녀의 사진기에 내 마음이 너무 많이 노출되었나 보다.

   

따가이 따이 화산 트레킹 

10년 넘게 비탈길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신념들을 섬나라에서 헤아려본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기 치지 말자. 몸(감성)을 머리(이성)에 귀속시키려는 연민을 경계하자. 몸이 전하는 솔직한 말에 귀 기울이자. 변명하지 말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자. 어려운 말과 거창한 계획으로 합리화시키지 말자. 상투적 일상에 지치지 말고 익숙함에 단호해지자. 낯선 곳에 매 순간 나를 세우려 애쓰자. 세속을 향한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자. 세상에 속한 미련들과 어설프게 타협하지 말자. 10점 만점에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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