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넷 여행 이야기 31 : 2014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마닐라-Banaue-Sagada-Bagio-앙헬레스-피나투보
사가다
이번 필리핀 답사여행의 백미는 단연 ‘사가다’ 동굴 트레킹이다. 3시간 반 동안 동네 청년 날라리 같은 프로 가이드가 이끄는 등불 하나에 의지하여 온몸으로 동굴을 헤맸다. 수 만년 동안 지켜온 동굴의 침묵이 되었고, 지구의 몸부림이 만든 거대한 동굴의 몸을 촉감으로 더듬거리며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아주 오래된 어둠의 깊은 틈에서 안쓰럽게 바동거렸다. 무기력한 방관자가 아니라 체험하는 나그네는 행복했다.
성당
‘사가다’에서 바기오로 가기 위해 로컬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뒤편 소박한 성당을 방문한다. 본당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예수의 모습이 신선하다. 나무로 형상화된 예수의 얼굴은 금발의 백인이 아니라, 필리핀 거리에서 쉽게 마주하는 평범한 얼굴이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들로 쌓은 재단 위에서 물고기 비린내 물씬 풍기는 예수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 오가는 이방인들을 위로한다. 금발의 백인 예수는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우상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예수를 더 이상 욕되게 히지 마라.
버스정류장
필리핀에 가면 필리핀 식을 따르고 즐기는 것이 여행 상식이다. 장거리 버스 예약도 사치스럽고 티켓팅도 따로 없다. 여행은 게으른 여백이자 뜻밖의 선택들이다. 긴장을 내려놓은 시행착오로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 엉킨다. 잘 훈련된 머리로 길을 찾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원시의 힘으로 부딪쳐야 비로소 여행의 흥이 돋는다. 공인된 절차와 익숙한 제 나라 문화에 사로잡힌 나그네는 낯선 길에서 하염없이 헤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