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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Jul 11. 2019

꽃이 펴야 봄이 온다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10)


셋넷을 처음 시작했던 2004년 가을과 겨울은 춥고 힘겨웠다. 난방시설이 전혀 없는 반지하에 모인 아이들과 교사들의 뜻과 의지가 뜨거웠지만, 교육을 위한 기본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고민으로 매일 밤을 뒤척였다. 열악한 학교시설도 문제였지만 계속 밀려드는 아이들을 품어줄 절대공간이 부족했다.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공부하고자 했던 탈북 청소년들이 많았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시설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어줄 정상적인 대안 학교들이 뒷받침되지 못했기에, 반지하 허름한 거리학교 셋넷으로 아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호떡 할아버지 김영우샘

그 무렵, 의미 있는 노후를 준비하시던 김영우 선생님(전 외환은행 부행장)이 나타난 건 행운이었다. 가끔 학교에 오실 때마다 길거리 호떡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곤 하셔서, 어느덧 아이들에게 호떡 할아버지로 통했다. 수업을 마친 뒤 저녁마다 몇몇 교사들이 모여 별 해결책도 없이 걱정만 하던 자리 한편에 조용히 듣고 계시다가 큰돈을 선뜻 조건 없이 빌려주셨다. 뜻밖의 선물처럼 주어진 그 돈으로, 영등포와 당산동으로 학교를 옮겨 안정적인 공간과 환경에서 셋넷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선생님은 운영위원장과 고문으로 셋넷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셨다. 5년에 걸쳐 빌린 돈을 갚았지만 어려웠던 시절을 지켜주셨던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2013년 강원도 도지사실에서 탈북 청소년 학교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왔을 때, 미국에 계셨던 선생님께 이 제안을 넘겨드려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할 수 있어서 마음 빚을 덜었다. 


셋넷 봄의 전령사.. 윤상석 권효숙 김준모 김영우 전성표 조현지 

셋넷 아이들은 캠프나 여행을 하면서 고향 이야기며 탈북한 얘기들을 편하게 풀어놓는다. 그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저리도 어둔 기억을 몸 안에 담고 있으면 얼마나 힘들까 느끼곤 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아이들의 아픈 이야기를 책(꽃이 펴야 봄이 온다, 민들레출판사, 2010)으로 엮었다. 숨기고 싶고 외면하고자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공개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아이들 자신이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5개월간의 고단한 작업이었지만, 여섯 분의 자원교사들이 멘토가 되어 마음 글들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고 격려했다. 탈북 청소년단체 간사, 교육인류학 박사, 오카리나 연주자, 전 외환은행 부행장, 목사, 대학생. 다양한 직업 배경과 삶의 연륜을 지닌 이들이 봄의 전령들 되어 봄날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들이 꽃을 피우게 도와주었다.     


‘얘들아!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게 아니라, 니들 맘속 꽃들을 피워야 봄이 온단다.’    


2011년 창작극4 이제 그 풍경을 사랑하려 하네. 2부 연극 나뉘어진 들판에서(이강백작, 박상영 각색 연출) 남북 대치 장면


고등학교 시절 꿈은 대학에 가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학교와 시교육청이 주최하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면 대학 추천서가 나왔다. 한국에서 입시 경쟁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는 것과 차이가 나는 제도다. 매해 이런 시험에 참가했고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졸업을 일 년 앞두고 모든 환경이 변했다. 당시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극심할 때였다. 친구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갔고, 공무원 집안이었던 집 형편도 좀처럼 나아질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한 달 이상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흔적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당 기관과 안전기관(경찰)에 신고했다. 아버지 당원증이 회수되었고 배급이 끊겼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 인적 사항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 줄은 내 삶으로 고스란히 넘어왔다. 

혁..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당시 한국으로 입국했다. 성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방황하다가 지금은 평택에서 맘 잡고 일하고 있다.     


아빠가 탈북하자 우리는 반동 놈들 집안이 되고 말았어요. 처음에 좀 잘 사니까 문이 닳도록 법관들이 오더니, 이제는 반동 놈들이라며 엄마를 감옥에 끌고 가서 두 달 동안 벌을 받도록 했어요. 외할아버지가 김일성 접견 자라는 큰 간부로, 항일 수령을 위해 일하면서 북한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아빠와 이혼만 하면 모든 죄를 면하고 다시 새롭게 살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아무리 구수한 말을 들어도 엄마는 아빠와 저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는 벌을 다 받고 나왔지만 파라티푸스라는 큰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죽은 시체처럼 정신을 잃고 밥 한 술도 못 먹고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열 살이었습니다. 집에 돈이 없어 치료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친척뻘 되시는 큰엄마가 도와주셨어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엄마는 살지 못했을 거예요.

심..1988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온성 인민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다. 2007년 고향을 떠나 6년간 중국서 생활하다 태국을 거쳐 2008년 2월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쫓김의 연속이었다. 북한 정보요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공안당국은 탈북자들을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범죄인 인도 차원이라는 명목 아래 대대적 색출 작업을 벌였다. 북한에서는 ‘반역자’라는 오명으로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혁명화’라는 명목 아래 강도 높은 노동으로 철저한 사상 개조를 시켰다. 북송된 대부분 탈북자들이 인간 이하 대접을 받았고 그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탈북자 모두는 북송을 매우 꺼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더욱이 경비가 허술한 외국 대사관들에 탈북자들이 대량으로 유입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경 근처 감시는 더욱 심했다. 먼 친척은 쇠고랑을 찬 채로 열차에서 뛰어내려 북송될 위기를 넘겼다. 

우리 가족도 공안의 감시를 피해 계속 옮겨 다녔다. 길림에서 천진, 청도, 항주, 장사, 남경 등으로 중국 대륙 북방에서 남방으로 옮겨 다녔다. 옮기는 내내 중국어를 할 줄 몰랐던 탓에 경각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일 년 반 동안 도피 생활을 계속하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혁    


그렇게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생일날 나는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막상 한국 땅에 도착했을 때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나는 거라곤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카메라가 엄청 많아서 깜짝 놀랐다는 점이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북한에선 타 보지 못했던 터라 멀미를 엄청 하는 바람에 먹은 것을 다 토하기도 했다.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는데 이 말을 했는지 저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좀 헤매면 그 사람들은 나한테 막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진짜 심한 말은 “다시 북한으로 갈래?”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어린 나는 진짜 보내는 줄 알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며칠간 따로따로 각방에서 조사를 받고 하나원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북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서 혹시 내가 북한으로 다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도 했다.

영..198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고등중학교 3년까지 공부했다. 2005년 고향을 떠나 베트남을 거쳐 2006년 7월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부르는 여러 이름들이 있었다. 실향민, 귀순자라는 표현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대량으로 정착할 시기에 탈북자, 북한 이탈 주민, 새터민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곤 했다. 내겐 ‘탈북자’보다 ‘실향민’이 마음에 와 닿는다. 처음부터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나마 새터민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다행이나, 그래도 한국에서는 탈북자라는 말이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탈북자’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보다, 살기 힘들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이 이름은 북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인식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수식어 그대로 남한 친구들에게 비치는 것이 안쓰럽기는 하다..혁 


2008년  가을, 적성과 진로탐색 커리어스쿨 '착한 마을 희망깃발 찾기'. 전라도 지역 자전거 여행.  #명이가 대활약했다.

    

“대입 검정고시 합격을 하면, 셋넷학교 휴학한 다음 알바하고, 학원 다니면서 공부 좀 더 보충하고 운동 자격증도 딸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운동 자격증도 많아야 되거든. 그렇게 자격증도 따고 돈도 벌어 놓고 면허 같은 것도 따야지…. 그리고 셋넷학교 돌아와서 공부를 더 해야지”

 “학원 다니면서 무슨 공부하게?”

“경호학과나 경찰 행정에 필요한 거 준비해서, 그쪽으로 지원해 보는 거지. 경호학과 다니면서 계속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누구 경호하고 싶은데?”

“아이 아무리 그래도 높은 사람 해야지. 대통령? 히히.”

“우와, 꿈이 야무진데?”

“알차야지. 그래야 뭔가 달라 보이지. 하하. 뭐 연예인이나 그런 사람들은 경호 안 해! 그럴 거면 집에서 아르바이트나 하고 말지. 음… 대통령쯤 되는 사람 딱 경호원 하면 간지 나잖아.”

“경찰은 왜 되고 싶어? 범인 잡고 싶어서?”

“응. 범인 잡아서 나처럼 방황하던 애들한테 나도 예전엔 이랬다고 눈도 감아 주고…. 그러면 솔직히 애들이 마음에 와 닿는 것도 많아서 자제하고 그만하는 애들도 있을 테니까. 안 되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못 하게끔 해야지. 나같이 사고 안치게끔. 그래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그리고 범인도 많이 잡아서 진급도 하고…. 히히. ‘아따 #명 경찰?’ 하면 ‘아! 뭔가 인간적인 경찰.’ 이러면서 북한에서 왔다고 영광스럽게 이야기하고 그런 경찰이 한번 돼 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명..1991년 함경북도 화성군에서 태어났다. 2003년 고향을 떠나 몽골을 거쳐 그해 7월 한국에 들어왔다. 정규학교에서 초등 6~중등 2 과정을 다녔다. 배달, 음식점 서빙, 공장 등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다. 한때 오토바이를 몰고 폭주족 친구들과 어울렸지만, 지금은 특수용접 자격증을 따서 폼 나게 살고 있다.    


2009년 8월 어느 날, 신문 기사 제목부터 뭔가 느낌이 팍 와서 클릭했더니 아닐세라 인기가 많은 기사였어요. 댓글도 굉장히 많았는데 거기에는 악플, 선플 다 달려 있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난 곳도 북한이고 거기서 어린 시절을 살다 온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은 더 오랜 세월을 살았구요. 물론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 도움을 받아서 또 본인 노력을 조금 보태서 여기서 살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엄연하게 우리가 태어난 곳은 북한이니 탈북자 대다수가 고향을 북한이라고 대답한 것은 당연한 일인 거죠. 이것이 기사가 될 정도일까요? 거기에 악플을 단 사람들은 또 탈북자들에게 가슴에 못을 박는 소리들을 해놓았더라고요.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라, 김정일의 충견이 돼라.”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말도 많았어요. 물론 선플도 많았지만, 유명인들도 이런 악플 때문에 상처 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1985년 함경북도 청진 시에서 태어나 고등중학교까지 졸업했다. 2002년 가을, 어머니와 친척 언니들과 두만강을 건넜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지금은 은행에 근무한다. 이쁜 딸을 품은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    


다시, 정처 없이 길 떠나는 아이들

동기 졸업생 중 많은 학생들이 정원 외 특례입학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한 학기를 마지막으로 공부를 그만두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1~2년 공부하고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한 뒤, 무시험 외국인 전형으로 들어간 대학에서 기초학습 역량 부족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고향 친구들이 한국을 떠났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났다. 친구들과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대학교도 들어가고 잘 되어 가는데 왜 가냐?” “아무리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어. 경쟁이 심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우리로선 이 땅에서 공부를 해도 힘들어.” 떠나며 남긴 친구의 말이 내 심정과 똑같았다. 

금..1983년 함경북도 아오지(현재 은덕군)에서 태어나 고등중학교 2학년이던 열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 2001년 한국에 왔다. 외대 중국어과를 졸업 후 대기업에 공채로 당당하게 들어갔지만, 지금 한국에 없다. 


* 이 책(꽃이 펴야 봄이 온다)은 완성된 연주곡이 아닙니다. 탈북 청소년들의 남한살이를 풀어내기 위한 서곡이면서, 통일 준비를 촉구하는 전령들의 준엄한 문제 제기입니다..정세현(전 통일부장관) 


*제목사진- 2011년 창작극4 이제 그 풍경을 사랑하려 하네 1부 담쟁이들의 노래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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