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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Jun 27. 2019

제 친구들과 인사하실래요? Ⅱ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9)

평양과 북한은 같은 나라가 아니다. 

모든 탈북자들이 국정원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을 이미 얘기했는데 황당하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북한에서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셋넷학교에 입학할 당시 13살이던 나래(가명)가 하마터면 조선족으로 오해받아 입국이 거절당할 뻔했다. 이유 인즉은, 북조선에서 중시하는 국가 주요 행사 날짜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 날짜는 모른 채 생일날 받아먹은 선물이나 생일날 풍경들만 기억해서 의심을 받았는데, 마침 같은 동네에 살던 아줌마 덕분에 구제받았다.    


우리가 접하는 북한에 대한 정보나 영상 등은 대부분 평양 사람과 생활을 담아 전해진 것이다. 아주 제한된 정보 때문에 우리들 시선은 은연중에 평양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북한 모든 지역 사람들이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거나 열렬한 공산주의자 들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동안 만나고 전해 들었던 얘기들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평양과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한 북한 지역은 상당한 사회문화적 격차가 있다. (남한의 서울과 지역들을 떠올려보라.) 좀 더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지역 간 이동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된 평양과 그 외 지역은 별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평양에 살고 있는 사람과 타 지역 사람들을 동일시하면 큰 혼란과 오해를 갖게 된다. 서울과 달리, 평양은 선택받은 사람들과 그들 가족과 후손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과 탈북해서 사는 사람들은 또 다른 문화 차이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탈북자들이 북한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대해 일반적인 정보나 내용에 대해 다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이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신분 구분이 엄격해서 해당 신분에 제한된 정보만이 제공될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과 지역을 순회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함경도 산골에서 살다온 탈북 청소년에게 북한 핵에 대해 질문하거나 평양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자기가 살아가는 도시 밖 지역들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남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탈북자들을 처음 접할 때 어떤 태도와 시선으로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태어난 지역과 자란 환경에 따라 삶이 다르듯이, 다양한 입장과 차이를 인정해야만 각각의 특수 상황에서 비롯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  


2007년 셋넷 창작극 '나의 길을 보여다오' 이대 공연. 처음 접하는 남한 문화에 당황하는 모습을 집단 마임으로 표현한 장면

중국에서 살고 싶어라

제도권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셋넷에 온 명수(가명)가 경험한 일이다. 고향에서 제 때 공부하지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간 명수가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남한 어린 중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는단다. ‘이런 것도 할 줄 아니?’ 뭘 잘못해서 우물쭈물 서툴게 할 지면, ‘그럼 그렇지. 탈북한 애가 뭘 하겠어.’ 

내가 만났던 탈북 청소년들 중 많은 애들이 북조선도 아니고 남한도 아닌, 중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한 북조선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고, 자신들을 동물원에 있는 이상한 동물 취급하는 남한에서는 살고 싶지가 않단다. 그저 적당하게 느슨하고 자신들이 평범하게 섞여 살 수 있는 중국이 자신들 기나긴 여정의 최종 종착지가 되기를 바란다.  

   

편견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들

셋넷학교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셋넷학교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밝고 명랑하네요?’ 탈북 청소년 적응과정을 담기 위해 방문했던 공영방송사 피디도 실망하며 취재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표정이 어둡고 외로워하는 탈북 청소년에 대한 취재 콘셉트를 이미 세우고 와서 보니, 또래 남한 청소년들보다 명랑하고 당당해서 당황한 것이다. 흔히들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물어볼라치면, 대부분 절반을 넘지 않겠냐고 대답한다. 흑인들 숫자가 미국 전체 인구수에서 10% 남짓하다면 다들 놀란다. 그만큼 선입견이나 편견이 지닌 독성은 전문가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깊고도 넓다.  

   

탈북 아이들은 일곱 색깔 무지개다. 희망 없이 떠도는 아이도 있고, 자본주의 삶의 언저리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아이도 있고, 갑자기 주어진 선택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실천력을 가지고 날마다 씩씩하게 행진하는 아이들도 참 많다. 이 아이들이 만나는 하루하루는 생기로 가득 찬 그 어떤 설렘이다. 이들이 일상 속에서 발산해내는 삶을 향한 눈부신 생명의 빛을 대할 때마다, 감동과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는 남한 제도권 청소년들 삶이 자연스레 비교되곤 한다. 미디어와 대중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탈북 청소년들은 일상 속에서 한없이 우울하다.  

   

버스종점에서 받은 잔돈

단체 카톡방으로 5기 졸업생 철수(가명)가 보내온 오래된 기억이다. 

집에서 밖에 나오기가 두려웠다. 자칫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웬만하면 집에만 머물렀다. 어쩌다 약속이 생겨 버스를 타면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일이 다반사였다. 2004년 버스요금이 750원인가 했는데 만원을 요금 통에 넣고 잔돈을 받지 못해 종점까지 간 적도 있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운전기사에게, 돈 넣는 곳에 돈을 넣었는데 뭐가 문제냐고 따지기도 했다. 체크카드를 만들려고 은행에 갔는데 영문 이름을 몰라서 직원이 대충 엉터리로 적어준 적도 있었다.     


2016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공연 떠나기 전 한국 공연(여해 문화공간). 탈북 청소년들이 겪은 남한생활을 뮤지컬로 표현했다. 


만철(가명, 9기 졸업생)이의 첫 알바

한국에 오자마자 알바를 시작하려고 벼룩신문을 뒤적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수유역 근처 코닥 치킨집에 전화를 하니 사장이 바로 오라고 했다. 수유역 근처에서 30분쯤 헤매다가 찾지 못해 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사장이 왜 아직도 안 오냐며 화를 냈다. 미성년 자격인지라 숙소를 배당받지 못해 임시로 머물던 그룹홈 신부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얘기했더니, 간판이 영어로 되어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다. 전화를 끊고 둘러보니 바로 10미터 앞에 치킨 집이 있었다. 사장이 화를 낼 만도 했지만, 왜 멀쩡한 우리말을 안 쓰고 영어를 쓰냐며 혼자 투덜대며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저는 신사임당 아줌마 싫어요

배우는 10기 졸업생 영희, 무대는 대구 근처 막창집, 때는 2012년.

손님 : (팁으로 오천 원을 주면서) 수고했어요.

나 : (기분 좋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사장 : (내 표정을 보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다음부턴 ‘전 신사임당 여사님 아니면 싫어요.’라고 말해라.

나 : (정색을 하고) 그 여자는 싫어요.

사장 :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까지도 5만 원권 돈에 그려진 사람이 신사임당인 줄 몰랐다. 그저 고리타분하게 생긴 옛날 여자가 싫었을 뿐이다... 다시 장면이 바뀐다.

나 : (식당에 손님이 없어 TV 광고를 보고 있다.) 

TV : 비빔면은 역시 팔도가 최고!

나 : 사장님, 팔도는 어디예요? 팔도에 가면 비빔면이 유명해요?

사장 : (웃음을 터뜨리며 정신없이 웃는다.)


수철이 엄마 속 터지네

수철(가명)이는 엄마가 먼저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뒤 불러들인 경우였다. 수철이가 한국에 왔을 때, 엄마는 일자리를 구해 쉬는 날 없이 온종일 일했다. 한국에 온 북한 중년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서 돈을 모았고, 북한에 두고 온 자식과 형제자매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데 돈을 아낌없이 썼다. 이렇듯 끈질긴 생명력으로 탈북 후 중국에서 잃어버린 자식들을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기어이 찾아내서 데려오는 영화 같은 일들을 목격하곤 했다.    

수철이는 엄마가 일 나가며 쥐어준 용돈을 들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눈에 띄는 곳이 있어 가보니 옷들이 걸려 있었다. 이 옷 저 옷 둘러보다 맘에 드는 옷을 들고는 얼마냐고 물었더니, 옷가게 주인이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기가 막혀하더란다. 불친절한 옷가게 주인아저씨는 동네 세탁소 주인이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을 몇 번 겪은 뒤 수철이는 용기를 얻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영등포역 앞 지하상가로 진출했다. 상가 점포들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한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고 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수철이가 계산하기 위해 내민 것은 은행통장이었다. 

수철이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지만 여전히 믿지 못할 실화다. 


10만 원짜리 전화번호  

셋넷 아이들 모두 두만강을 건너 중국과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는데, 비무장지대(DMZ)를 곧장 넘어온 21살 꺽다리 준구(가명)다. 준구의 별명 ‘칠천 개’는 내가 지어줬다. 그가 분단의 철망을 넘어오는 동안 그를 가로막았던 지뢰가 무려 칠천 개가 넘었다는데 준구는 무사했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준구가 하나원에서 나와 사귄 친구들에게 이끌려 간 곳이 변두리 단란주점이었다. 열기가 식고 친구들은 하나 둘 사라졌지만, 딱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던 준구는 어울려 놀던 아가씨와 좀 더 노래하다가 아쉬워하며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전화번호를 받아 든 아가씨는 놀라며 입이 찢어질 듯 좋아했다. 종이를 찾던 준구가 주머니에서 꺼내 써준 종이가 10만 원 수표 뒷면이었기 때문이다. 준구에게는 수표가 한낱 종이조각으로만 보였단다. 

  

명수와 철수와 만철이와 영희와 수철이와 칠천 개와 또 다른 셋넷 망채들이 한때 겪었고, 어처구니없게 보여준 생활개그들은 씁쓸하고 슬프다. 우리가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할 다리는 멀고도 길다. 답답한 심정을 바람에게 물어봐야 하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 밥 딜런)일까.    


*제목 사진 - 2011년 창작극 '이제 그 풍경을 사랑하려 하네!' 1부, 내 고향 아오지(인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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