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훈(셋넷 수호천사, 평론가)
이 여행의 목적지는 어딜까? 일본의 유명한 시인 바쇼가 최소한의 물건을 지닌 채 방랑을 통해 시를 쓰고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여정이 최종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 여행을 마치는 책의 끝부분에는 카바피의 시 ‘이타카’가 이런 말을 들려준다.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다고, 길 위에서 그대는 이미 풍요로워졌다고.
책에서 미처 소개되지 못한 카바피의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향이다. 모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의 목적지다. 모든 여행의 목적지와 같은 의미다. 한국이 셋넷들의 이타카였다. 하지만 한국이 셋넷들에게 줄 것이 있었을까?
책의 앞부분에는 저자가 탈남(탈북이 아니라)한 셋넷학교 학생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북을 떠난 탈북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탈남은 남한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다. 오슬로에서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들이 탈남 학생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타카였던 서울이 자신들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또다시 두려움을 떨치고 길로 나섰다. 그것은 셋넷학교가 서울을 버리고 다시 원주로 간 이주의 역사와 같은 성격의 사건이다. 셋넷과 탈남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 떠난 자들이 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얼굴을 찾는 일이다. 나의 얼굴을 어떻게 찾을까? 저자는 쉬운 말로 답을 준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세상 눈치 보지 않는 내가 참된 나다. 나는 나다.’ 세상 눈치를 보면 큰 기표가 나를 대신하여 삶이라는 큰 구멍을 채운다. 큰 기표란 장군님이거나 주님이다. 혹은 서울의 다른 이름인 ‘돈’이다. 또는 ‘와이파이’다. 게다가 큰 기표조차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양이라는 기표는 한때는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다가, 곧 동방의 모스크바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의 얼굴을 찾으려면 떠나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이 책은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길로 나선 여행 공동체에 바친 경건한 기억이다.
* 사진 : 남원에서의 셋넷 마지막 평화행사(2022년 7월 30일, 이민정 김가온과 함께하는 평화 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