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의 비전

by 박상영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에 대해 형사처분 대신 보호처분을 받도록 하는 촉법소년 제도는 형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도입돼 70년 넘게 같은 기준으로 유지됐다. 미성년자의 형사 범죄가 증가하고 이 제도를 악용하는 일부 사례들도 나타나면서 연령 하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우리 사회가 소년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라는 비전을 보여줬는지 먼저 점검해 봐야 한다"며 숙고론을 펴기도 했다. (CBS노컷뉴스 2026. 2. 27)


실무 장관의 애매하고 모호한 70년 해묵은 안전행복론을 듣자니 영화 <남한산성>이 떠오른다.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나라가 쑥대밭 되고, 백성들은 유린당하고, 무능한 왕은 남한산성에 숨어 우왕좌왕 전전긍긍하는데, 조선을 운영하던 사대부 대신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편 가르기와 비현실적인 방도에 심취해서 갑론을박 파국을 향한다. 실무부서 공무원의 책임자라면 자기 신념과 철학의 구름 위에서 내려와 국민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마땅하지 않은가.


둘째 아이 중학생 때 일이다. 빅 쓰리에 들어갈 실력으로 학교를 평정하고 지역 게임방을 접수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게임에 미치다시피 한 둘째를 어쩌지 못한 엄마는 전설의 중학교 선도부장 출신 아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어르고 달래다 결국 일일 게임 시간을 정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대다수 집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내 집이라고 비껴갈 리 없었다. 대안적인 삶에 꽂혀 하숙생처럼 집을 드나들던 아빠의 선도는 무용지물이었다. 어쩌다 집에서 쉬는 날 추락한 선도부장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약속된 게임시간을 무시하는 둘째를 큰 소리로 호출했다. 서슬에 놀라 방에서 뛰쳐나온 아이의 얼굴은 승부로 벌게 있었고 두 눈동자는 아직도 게임을 좇아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대 흐름에 민첩한 젊은 후배를 찾아 진지하게 물었다. “프로 게이머 하면 먹고살 수 있니?” 직업과 게이머의 삶을 한 번도 상상하거나 진지하게 연결시켜 본 적이 없었기에 참으로 난감했다.


게임에 미쳐있던 둘째 나이 나의 시절은, 운동선수나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이 되어볼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집안을 초상 분위기로 만들었다. 부스럭거리는 피를 어쩌지 못해 음악에 빠져있던 고1 때였다. “너 음대 갈 거니?” 아버지가 묻고는 재산 목록 1호였던 빽판(LP 복사판)들을 내다 버렸다. “대학 가거든 니가 하고 싶은 거 해라” 반항심이 솟구쳤지만 전쟁과 가난의 폐허에서 기적을 일군 아비의 합리적인 전설을 거스를 수 없었다. 47년 전 지극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가문의 풍경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사귄 지방 출신 친구들은 대학생활 내내 번민하고 방황했다. 뒤늦게 자신이 하고픈 일과 삶을 찾았지만, 소 팔고 논밭 팔아 성공에 목을 매는 고향 부모의 간절한 대리 소망을 어쩌지 못했다. 무난한 직장과 결혼을 선택하고 무채색으로 한 시절을 떠밀리듯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나와 같은 세대 부모들이 아버지 시절 방식대로 자식을 대했지만, 소박한 신화적 스토리조차 없는 밋밋한 부모를 언젠가부터 가여워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디지털 난민이자 아날로그 유목민인 아빠를 언제부터 안쓰러워하며 한심하게 대했을까. 분명 70년은 넘지 않았다. 하물며 내가 태어나기도 전 법과 국민정서를 기준으로, AI(인공지능)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춤추고 꿈꾸며 일상을 사는 소년소녀들을 선도善導하고 점검하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7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았는가. 성공과 행복을 꿈꾸지 않는 시대는 없다. 시대의 행복은 루저(실패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렸다. 영원히 변치 않는 루저는 없다. 어제의 루저가 오늘은 화려하게 부활하는 게 신자본주의 세상 아닌가.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종이 비非 화이트칼라 직종보다 AI로 대체될 위험에 더 크게 노출돼 있다며 위험 노출 상위 직종으로 연구원, IT 개발자, 데이터전문가, 변호사, 회계사, 디지털마케터, 기자, 영상제작 전문가, 실용음악작곡가, 시각 디자이너 등을 꼽았다./연합뉴스 2026.3.16.) 환상 속에 그대가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은 Yo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 환상 속의 그대, 서태지와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