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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r 07. 2019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를
시작하며 (1)

몸의 말(느낌),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상의 나침판


함부로 게기지 마라. 

학창 시절 자주 듣던 말이다. 고교시절, 시대는 한없이 어두웠고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몰라 암담했다. 난생처음 외로웠고 구원받듯이 음악에 정신없이 빠져 미친 듯이 LP판을 사서 들었다. 그런 내게 부모님은 냉정하게 물어보셨다.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니가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라’ 부모와 교사는 차분하게 다그쳤다. 합리적 이유 없이 그럴 거라면 함부로 게기지 말고 부모가 살아본 세상에 순응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내 느낌에서 비롯된 행동과 태도들을 왜 타인의 방식에 맞춰 조리 있게 설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동의한 적 없는 기성세대 생각과 권위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받았던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생각이 모자라거나 존재가 성숙하지 못한 게 아니라 몸의 느낌으로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많이 억울했다.    


뭔가를 바라보고 관찰한 뒤 궁리하여 엮어낸 머릿속 말은 ‘생각’이다. 뭔가를 바라보는 순간 떠오르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운들이나 직접 부딪쳐 겪은 후 막연하게 형성되는 몸속 말이 ‘느낌’이다. 우리 삶을 단순화한다면, 일생동안 생각의 동네와 느낌의 마을을 건너 다니다 생을 마치게 된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생각과 느낌의 존재감이 사뭇 달라 자유롭고 평등하게 왕래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과 느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소설 혼불을 읽어보면, 해방 전 일제시대까지도 우리나라는 한 지역을 오래전부터 지배해온 양반집이 제일 윗동네 양지바른 곳에서 아래를 굽어 살피고 아랫동네로 가면서 양반을 섬기는 노예들과 평민 소작들이 살고 있었다. 그처럼 우리 일상에서는 대체로 생각의 동네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윗동네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고, 이성의 통제 하에 불확실한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느낌의 마을이 아랫동네에 뒤쳐져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시하거나 이끌게 되고 느낌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습관, 제도, 교육이라는 환경 속에서 생각에 일방적으로 사로잡혀 의심 없이 수긍하게 되거나 마지못해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구축된 소통구조는 가족과 소속 집단의 끈끈한 간섭을 거쳐 결정적으로 학교라는 국가 도구를 통해 구조화되고 일반화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게 된다. 왜?라는 의혹은 교실에서 품어서는 안 되는 불온한 것이어야 하고, 근대국가가 정해놓은 표준과 일방적 지시에 대한 나의 불편함과 자존감은 참고 인내해야 하는 개인의 몫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느낌에 대한 생각의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머리말(생각)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을 주도하게 되고, 몸 말(느낌)은 그저 휴식과 안정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깊고 투명한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

영화 <프리스트>에서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해 상처 받은 소녀가 동성애로 낙인찍혀 외면당하는 지역 성당 사제를 안아주고 위로하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삶을 살다 보면 때때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충고나 말들보다, 상처 받은 마음을 함께 공감하며 큰 울음을 나누는 것이 상대화될 수 없는 개별적인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렇듯 안타까운 상황이나 가슴 아픈 일들을 경험한 뒤 생각(머리말)은 이해관계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해버리지만, 느낌(몸 말)은 이해타산을 넘어 오래도록 기억하곤 한다. 두 개의 말은 오래전부터 개인과 집단과 사회 속에서 긴장과 조화를 오가며 진화해왔다.     


‘몸 말’과 길 위의 학교

교육 관련 시민사회활동을 하면서 맺었던 만남들은 교실과 학교가 아니었다. 학교가 베푸는 주입식 교육과 권위에 눌려 이유도 모른 채 아파하다가 방황하던 길거리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길에서 만난 탈(脫) 학교∙탈북(脫北) 아이들은 생각에는 서툴고 어색했지만, 느낌은 깊고 진했다. 생각들은 언뜻언뜻 거칠고 불쑥불쑥 뱉어내는 말들은 앞뒤가 엇갈렸지만, 마음은 정직하고 따뜻했다. 사람과 세상에 적대적인 듯 보였지만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기억해달라는 간절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보내는 몸의 사인이 적지 않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던 것은, 느낌으로 충만했던 어린 시절과 억울했던 청소년 시기의 기억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훗날 자원교사와 후원자들로 만난 또래 동료들 역시 성장기에 겪었던 개인적 상처와 좌절들을 어쩌지 못한 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이들은 자본주의 셈법에는 뒤쳐진 듯 보였지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共感)하는 감수성은 세속에서 명예와 힘을 얻은 이들보다 훨씬 더 두터웠다.     

이들과의 만남과 인연으로 갑자기 환한 세상을 만난 듯 나의 30~40대 시절은 행복했다. 논리와 계산으로 온 세상을 세계화하려던 시대의 흐름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적의와 긴장 없이 함께 걷는 길을 찾아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 시장에 갇혀 다른 사람들 삶이나 흉내 내며 무력하게 표류하다, 주어진 삶의 이유를 물으며 나다움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06년 개교2주년 공연, 춘천 고슴도치섬. 이두성(마임) 송은주 전영훈(인형극)과 로고 글을 주신 이외수샘이 축복해주셨다.


생존(生存)을 넘어 자존(自存)의 힘으로...

셋넷학교가 빚어낸 삶의 이야기들은 여러 갈래 길 위에서 빚어졌다. 상처 받고 버림받아 헤매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들과 따로 또 같이 나눈 몸의 말들로 채워진 여행 이야기다. 우리는 머물지 않고 매 순간 대책 없이 떠났고 생각들로 길들여진 세속의 길들을 완강하게 거부하고자 했다. 돈과 권위에 지배받지 않는 낯선 곳을 여행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배움들을 스스로 찾고 서로 나누려 애썼다. 

때때로 과거의 아픈 기억과 막막한 미래 때문에 눈물짓고 불안해했지만, ‘지금’(now) 웃고 노래하고 ‘여기’(here)에서 용기 있게 춤을 추곤 했다. 자기 언어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막막한 불안에 맞서는 내공을 키우려 했다.  

   

우리가 매번 마주쳐야만 했던 ‘지금’과 ‘여기’는, 진부한 생각들로 막히고 일방적인 머리말들로 닫혀버리는 생기 없는 현실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길에서 경험했던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몸의 느낌들로 기억하며 내 고민이 우리들 꿈으로 변화했던 지난 24년 배움과 나눔들을 되살린다. 이 순간 생존을 넘어서서 자존의 힘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희망의 모닥불을 지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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