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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r 21. 2019

산 넘고 물 건너 힘겹게 왔는데...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2)


호그와트학교 검색키워드는 '관계상상력'

셋넷학교를 한국의 ‘호그와트학교’라고 소개하곤 한다. 전교생 모두 합쳐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데 교사는 50여 명이나 되는 이상한 학교다.(2004년 개교 당시부터 2011년 서울을 떠나 강원도 원주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던 2016년 시절 무렵) 학생들 나이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지만 교육 수준과 학력이 뒤죽박죽인지라 부득이 초중고교 통합수업을 해야 하는 괴상한 학교다. 학생들 중에는 부모가 없거나, 어릴 적 헤어져서 생사조차 모른 상태에서 어딘가에 있을 그들을 가슴 저리게 그리워한다.     


학생들 고향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명들이다. 양강도 혜산, 함경북도 무산, 함경남도 함주, 함경북도 회령, 강원도 천내, 함경남도 담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모호한 도시와 지역들이다. 이들 대부분 10대 전후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향을 떠났고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3~5년에서 길게는 7~8년간 중국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불법으로 체류하며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느닷없이 붙잡혀가거나 팔려가는 불안한 신분으로 떠돌다가 죽음의 산들과 강들(그 산들과 강들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야밤에 건너다가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총에 맞아 죽고 강에 빠져 죽어서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을 건너서 극적으로 남한에 들어온 탈북 이주민이자 국제 난민들이다.     


셋넷에서 공부하는 탈북청소년들이 남한에 와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20여 년 분단현장에서 탈북청소년을 교육해 온 전문가답게 정곡을 찌르는 답을 들려줘야 하는데 고작 내가 들려주는 대답은 시시하다. 여러분이 영화에서처럼 집에 가다가 납치되어 정신을 잃고 이틀 뒤 깨어보니 북한 어느 낯선 지역에 홀로 있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뭐가 제일 힘들고 어려울까요? 대답 대신 엉뚱한 상상을 하도록 되묻곤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설고 막막한 땅에서 습관처럼 해오던 자연스러운 행동들은 어색하고, 겉모습과 옷차림은 어정쩡하며, 말투와 표정은 한없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순간 두려움에 빠질 것이고, 그동안 배웠던 지식과, 확신했던 믿음과, 상식의 잣대로 활용했던 이성의 근거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과 혼란은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할 낯선 일상을 옥죄어올 것이다.     


황당하고 지독한 존재의 뿌리 뽑힘 앞에서 당신은 어떤 꿈과 행복을 일굴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당신을 가로막는 좌절의 정체가 무엇일까? 이 실존적 질문 앞에 당신이 설 수 있을 때 당신 곁에 다가온 낯선 누군가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익숙하고 이기적인 처지로부터 느끼고 공감하는 ‘관계 상상력’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당신은 이해의 정체와 나눔의 내용을 헤아릴 수 있을게다.    


일상에서 있는 그대로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할 때...

셋넷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은 어린 시절 절박하게 굶주렸고 비참했던 기억들을 종종 얘기한다. 일주일 열흘 씩 굶어야 했던 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고 생존을 위협했던 공포를 몸속 깊숙이 새기며, 낯선 나라들과 영문 모를 도시들을 정처 없이 헤맸다. 기막힌 운명의 힘에 이끌려 마침내 도착한 남조선,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그토록 바랐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산넘고 물건너 자유찾아 힘겹게 왔으니 세상 밝혀줄 별을 담을 큰 그릇이 되어라. 이외수님이 글, 그림을 직접 주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찾아온 대다수 사람들은 탈북자들을 아주 딱하고 불쌍하게 바라본다. 이들이 품고 있는 고난을 극복했던 놀라운 능력이나 역동적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상상했던 대로만 이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려 든다. 오래된 이념 편향의 잣대로 탈북자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언제든 위험하게 본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경계하면서도, 승리에 도취한 챔피언처럼 통쾌하게 깔보며 서슴지 않고 이들에게 모욕을 안겨주곤 한다.     


기나긴 여정을 거쳐 우리 곁에 왔건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못한 채 병들고 시들어가던 그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또다시 유럽과 세계 각지로 정처 없이 떠났다. 2009년 영국에서 만났던 셋넷 아이들은 남한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했고 고마웠다고 했다. 다만 너무 일상이 불안하고 힘들어서 떠났다고 담담하게 얘기했다. (오원환감독이 연출한 셋넷다큐영상 특별판 중 작품 rootless,2009) 몹시 부끄러웠다. 거리낌 없이 편견을 배설하고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고 떠나야 했던 슬픈 운명들을 떠올리면 안타깝고 화가 난다. 다행히도 2018년 여름 다시 만난 유럽의 셋넷들은 건강하게 살아남아 가족을 꾸리고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탈남하여 세계를 떠도는 셋넷아이들의 기나긴 여정은 뒷 연재 글에서 비중 있게 이야기하겠다.)      


나눔의 전제는 관계성이 아닌가. 이기적인 주고받음 말이다. 이타적이라고 하는 사랑과 우정도 결국 이기적인 주고받음이며 세상의 모든 충효와 신앙조차 아름다운 계산이고 거래다. 하지만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의 시선으로 관계를 분리시키고 왜곡시켜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혼자 살 수도, 일 할 수도 없다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느끼고 서로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에게 부족하고 비어 있는 것들 때문에 이기적으로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 한때 가족 친척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70년 가까이 지독하게 미워해왔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도록 왜곡시켜왔다. 그러는 동안 너무도 달라져 버렸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정말 별로 없다. 어찌해야 할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소박한 관심과 수용의 태도를 갖추지 못한 채, 갑작스레 평화와 공존의 삶이 닥쳐온다면 적대적 혼란과 생경한 일상에서 어찌할 수 있을까?     


탈북자는 한반도 평화와 공존을 예비하는 미래 사절단

내가 만났던 탈북청소년들 중에 자유를 찾아 탈출한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아야 했고, 기약 없이 굶주렸고, 병들고 술 취한 아비 때문에 집안 살림이 너무도 고달팠고, 어린 마음이지만 내 입 하나라도 덜어보려는 갸륵한 뜻으로 무작정 강을 건넜단다. 남한이란 용어가 뭔 말인지 모르고 그곳이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미국에 가자니 말이 통하지 않아 두려웠고, 남조선이라면 그래도 같은 민족이니까 살만하지 않을까 싶어 주저하면서 왔단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고 선택하지도 않았던 운명이지만 갈라진 땅 한반도 반쪽 나라 남한에서 이들 존재는, 미래 시간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처럼 도착한 평화사절단일 수밖에 없다. 그토록 염원하던 약속의 땅, 약속의 시간을 천천히 준비하고 연습하기 위해 우리 삶 속에 예고도 없이 온 것이다. 


2007년 여름, 남북 청소년이 함께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하며 여행했다.  


내가 만나고 경험했던 아이들은 촌스럽지만 불쌍하지 않았다. 영어는 도무지 못했지만 무슨 일이든 거침이 없었다. 학교 내부를 수리하거나 이사할 때면 모두가 일을 척척 해내서 셋넷이삿짐센터를 차려 부업을 해볼까 농담을 하곤 했다. 매일 식사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스스로 먹거리를 해결하고 뒷정리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학교 부적응 청소년들과 캠프를 다니면서 설거지조차 할 줄 몰라 쩔쩔매던 남한 청소년들에게 익숙했던 나는 그저 놀라웠다.     


이들은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삶이지만 진지한 열정과 작은 소망들로 가득 차 있다. 남한 또래 청소년들처럼 자신들 삶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내는 힘과 능력을 고난의 대가로 얻었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가 감당해야 할 버거운 짐이 아니고, 지난 슬픈 역사가 남겨놓은 우울한 빚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에 와 있고 이들과 살아야 한다면, 더불어 살아야 할 평화의 시간과 공존의 공간을 상상하고 연습하는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60년이 넘는 막힘의 세월을 지나 소통해야 하는 시간과 공간은 분명 자본이 바탕이 되어야겠지만 자본에 의해서 전체 시스템이 장악되거나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 우릴 사로잡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격적으로 존중하려고 서로 애써야 하고,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서로의 다름과 차이들을 받아들일 마음가짐과 구체적인 태도를 넓혀서 공존(共存)의 울타리를 쳐야 한다.     


지금 우리, 여기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고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리신 기도를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품속에 숨겨둔 도시락을 꺼냈던 겁니다.” (정진석추기경)    


남북의 오래된 이웃들이 어우러지는 사람 마을을 상상하고 현실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품속 도시락들을 기꺼이 꺼내야 할 시간이다. 가난하고 허전했지만 창피해하지 않고 서로의 도시락을 나눠먹던 어릴 적 ‘내 마음의 풍금’들을 기억한다. 그 기억들을 지금 여기에서 나누면서 우리 다시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 제목바탕 사진은 2011 셋넷창작극공연5 '이제 그 풍경을 사랑하려 하네' 광주공연

* 첫째, 셋째 주 목요일마다 우리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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