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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pr 04. 2019

아직 끝나지 않은, 기나긴 여정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3)


지난 이야기에 대하여

연재 글을 시작하며 두 개의 단체 카톡방을 열었다. 하나는 셋넷 졸업생 중 연락이 닿는 학생들 방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교사와 후원자 중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주었던 셋넷수호천사들 방이다. 브런치 글 연재를 핑계로 오랫동안 소원했던 이들과 다시 이어지게 되어 기쁘다. 반가운 분들도 있겠고 내게 받은 상처로 흩어진 분들은 뜨악할 것이지만 그게 대수인가. 우린 한때 낡은 시대의 경계를 넘어 대안적 세상을 그리워하던 전사들이 아닌가. 그 기억과 추억이면 족하다. 용서할 때마다 세상은 변한다 했으니 부디...  


기억이란 주관적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식으로든 왜곡된다.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 기록이나 연구 결과물이 아니다. 셋넷이라는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고 그들과 나눴던 삶의 이야기다. 일방적으로 구축한 인위적인 조립품이 아니라 여럿이 따로 또 같이 엮고 만들어간 삶이었기에 그들의 집단 기억과 추억들을 소환한다. 셋넷을 이끌었던 두 개 생명축인 학생과 교사들을 통해 내 흐린 기억과 기울어진 추억들을 다만 조금이라도 바로잡고 싶다.   

단톡방에서 두 번째 글 주제였던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학교’와 내용 중 탈남(脫南)해서 다시 유럽과 세계를 떠도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의견을 주었다. 첫 응답이라 일단 반가웠지만 지적이 날카로워 글을 다시 살피게 된다. 두 개의 주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에 뒤의 연재 글에서 비중 있게 다루겠다. 너무 성급했다.       


남한에 온 것을 후회하는 아이들

셋넷은 개교 당시부터 학교를 개방적으로 운영했고 지금까지도 이 원칙은 지켜진다. 커리큘럼과 학사운영방식, 교육내용과 현장 활동을 제한 없이 공개하지만 아이들 인권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이런 오해를 많이 받았고 모함받는 단골 소재지만, 일상의 이웃이 된 탈북자를 신비화시키거나 정보를 독점해서 왜곡하고 편향된 담론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지키고 싶었다.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이념과 비이성적 권력 때문에 뿌리내린 탈북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동기고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지만, 셋넷 초기 시절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가 난무했다.


2009년 9월 창작 노래극 3( 다르거나 혹은 같거나, 내일을 꿈꾸며) 국민대 공연. 외대와 압구정 공연장에서도 공연했다.


2009년 창작극(다르거나 혹은 같거나, 셋넷 영상작품집 3)은 아이들이 현실에서 겪은 일들을 엮어 노래극으로 공연했다. 알바를 구하러 가서 이상한 말투 때문에 노골적으로 어디서 왔느냐는 심문을 당한 뒤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차를 타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봐서 늘 말조심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다. 애들은 가급적 말을 삼가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습관에 저절로 빠져들었고, 빨리 서울말을 익힌 친구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탈북 청소년 일상에 제멋대로 끼어들고 무례하게 개입했다. 셋넷 아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거쳐 온 탈북과정보다 지금 상황들이 더 힘들고 우울하다며 남한에 온 것을 후회했다. 중국이나 동남아 나라들에서 몸이 고달프고 잠자리가 불안정했지만, 남한에서는 의식주 문제는 편한데 매일 보이지 않는 유령(자신들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과 수군거림)들과 싸워야 하는 중압감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역들을 방문해보면 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했다.


“너네들 이거 뭔지 아니?”

매년 4월과 8월 두 번의 검정고시를 마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캠프를 떠난다. 셋넷은 학력취득을 위한 검정고시 공부만큼이나 남한사회와 문화를 체험하고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현장체험활동을 중시한다. 학력인증이나 자격증 한 장으로는 남한사회 현실 정착과 문화적응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기회를 커리큘럼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던 것이다.     


남도를 돌아보는 캠프를 기획해서 해남을 방문했는데 다른 여타 지역에서처럼 반겨주었다. 아마도 처음 보는 북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대한을 찾아온 귀순자에 대한 따뜻한 환대의 심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호기심과 따뜻한 시선들이 소풍 떠난 아이들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하고 말았다.  

‘쟤들이 우리말을 알아듣느냐’고 묻기도 하고,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상당 기간 머물다 입국한 아이들에게 바나나를 들고 ‘이게 뭔지 아느냐, 이렇게 까서 먹는 거라’고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그들 표정에 악의적인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상처 받기에 충분했다. 해남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사람고기 먹어봤느냐’는 질문까지 받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분통을 터뜨리는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너희들이 곧 만나야 하는 현실이고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니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해라. 분단된 나라에서 상처 받은 건 너희들만이 아니라 저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너희들이 먼저 나서서 맺힌 아픔들을 풀어내야 한다. 시대를 앞서 온 니들 운명이고 고단한 팔자다.”    


2010년 4월 검정고시를 마치고 해남 초등학교에서 공연과 대화시간을 가졌다. 지역들을 탐방하고 문화교류행사를 지속했다.


통일운동 같은 거 안 하고 잘 놀았는데, 어쩌다 보니...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셋넷학교를 찾아왔다. 셋넷을 제외한 다른 학교들이 종교적 목적과 선교 재원으로 운영되고 아이들 인권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소극적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열려있는 셋넷을 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학력취득 검정고시 수업과 정보화 자본주의 이해 수업을 돕기 위해 온 자원봉사자들부터, 석사 박사 논문을 쓰거나 취재를 위해 오는 이들로 좁은 교무실은 늘 번잡했다.     


작고 힘없는 셋넷에게 이들은 탈북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는 작업에 중요한 파트너고 실제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줬다. 특히 여러 탈북 청소년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밝고 거침없는 셋넷 아이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어둡고 불행한 내용이 주를 이루던 당시 탈북 청소년 기사들이 셋넷을 통해 밝고 씩씩한 모습들로 바뀌어서 큰 힘이 되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인터뷰에 응했는데 마지막 질문은 한결같았다.    

“어쩌다 탈북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하게 되었나요? 혹시 대학생 시절 통일운동이라도...”

“통일운동 안 하고 잘 놀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80년대 초반 대학시절은 어지럽고 우울했다. 캠퍼스는 늘 메케한 연기로 자욱했고, 정문 앞을 지키는 경찰 진압차 확성기에서 수시로 오늘 수업이 없다면서 친절하게 알려줬다. 데모하다 쫓기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강의실 복도를 달리는 양아치같이 생긴 형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서클을 기웃거리는 건 자연스러웠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시위를 준비하던 어느 날 시위 전단 단어와 문장들이 일반 시민들 정서와 괴리되니까 일상의 언어 표현으로 바꿔보자는 신입생의 이유 있는 발언을 유연하게 받아줄 선배도 없었고 그럴 한가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경직에 대항해서 싸우다 경직에 경직당했던, 시대의 우울한 경직이었다. 몇 차례 술집에서 술판을 엎으며 논쟁을 벌이다 뛰쳐나와 문화예술 공연에 빠져들었다.    

 

2007년  네팔 카트만두  티벳학교  마당극공연(나마스테! 평화야 놀자)  봉산탈춤 멘토 신수명, 김진욱선배와 함께 공연했다.


생애 최고의 선물

연극, 영화, 마당극도 성에 차지 않아 당시로는 낯선 뮤지컬 공연에도 직접 참여했다. 온몸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여러 역할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흠뻑 빠져들었다. 한때 전문 극단과 무용단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문화예술인을 딴따라로 폄하하며 업신여기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용기 있게 선택하지는 못했다.

나다운 표현과 감성을 키워준 멘토들은 분야의 대가들이었다. 뮤지컬 연출가 양정현, 극작가 이강백, 현대무용가 이정희, 마당극 연출자 임진택, 마임이스트 유진규. 최고의 고수들을 만나 닫힌 몸을 열고 새로운 감수성을 찾게 된 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대학시절 몸에 새긴 자유롭고 거침없는 표현과 행동들 때문에 셋넷 아이들과 교사들이 내 전공을 궁금해하며 내기까지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많이 추측했던 전공이 체육학과였다. 그 덕분에 평생 운동을 하긴 했다. 문화운동, 교육운동..) 그때 경험과 기억들이 나중에 하게 된 대안교육 내용과 형식으로 진화하며 구체화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소 위험했던 군 복무를 몸성히 마친 뒤 결혼과 동시에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술을 좋아하고 남들보다 잘 마셨기 때문에 회사생활은 별 문제없었지만, 회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매번 대립하고 어긋나서 겉돌았다. 높은 연봉 때문에 주저하다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극작가 이강백선생님의 도움으로 NGO 세계로 들어섰다.

새롭고 낯선 길이 주는 설렘과 기쁨으로 들떴지만 안정적인 삶에서 일탈(逸脫)한 대가는 컸다. 평범하고 무난한 직장생활을 원했던 아내가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한 번뿐인 나만의 인생을 왜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답답해하며 매번 충돌했다. 이때부터 부부생활은 금이 가기 시작해서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제목사진,  2010년 기나긴 여정-4개의 기억전(인사동 토포하우스). 인형극연출가 송은주샘이 함께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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