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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pr 18. 2019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학교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4)


1990년대 초반 교육문제에 관심 있던 시민단체 간사, 현직 교사, 대학생들과 우연히 만나 첫 번째 대안학교인 따또학교(따로또같이 만드는 학교, 1995~2001)를 같이 채웠다. 이들과의 인연이 전혀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될 운명적 만남이 될 줄이야.... 입시위주 주입식 교육에 병들고 지친 아이들이 학교를 뛰쳐나오기 시작했지만 배움을 이어 줄 학교 밖 대안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고, 교육전문가라는 교육학 박사와 교수들은 낡은 진단과 공허한 평가를 반복해서 우리들 안타까움을 매번 배반했다.   

 

더 이상 국가와 전문가에게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학교를 직접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모두들 각자 일들이 있었지만 토요일 하루 수업을 위해 주중 퇴근 후에 서너 차례씩 만나 행복한 공부를 나눴다. 1년간 준비를 거쳐 1995년 탈학교 부적응 청소년을 위한 주말 문화학교 따또학교를 시작했고, 7년간 문화예술(글,그림,연극,영상,춤,사진)과 캠프, 여행을 매개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새로운 감수성을 키우고 관계 소통 훈련을 했던 집단활동 내용과 형식들이, 훗날 셋넷학교 대안교육 뿌리가 되었고 근간이 되었다.     


습관적으로 무심히 지나쳤던 길에서 인상에 남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 풍경을 찍은 이유와 느낌 나누기(관찰 감수성 키우기), 필기구 없이 빈종이 한 장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해보기(낯선 감수성 찾기), 말을 멈추고 신체 일부분으로 반갑게 인사 나누기, 눈을 가린 친구를 말하지 않고 몸으로만 인도하기(몸 말 살리기), 음악과 춤으로 자기 고민과 소망 표현하기, 공동 작업으로 소망하는 세상을 영상에 담아보기(새로운 오브제로 내면 살피기), 말을 끊고 마임으로 소통하기(마음의 움직임 지켜보기), 자기 몸이 한 조각품 일부가 되어 집단 창작으로 인간 조각품 만들어보기(사람 그물망 깨닫기)...말을 넘어 잃어버린 감수성을 되찾기 위한 따또 소통 프로그램들이다. 새로운 감수성으로 나와 내 안에 나, 나와 너, 나와 사물들 관계를 성찰하고 바로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진로탐색 작업이다.  


2005년 부천 봉사캠프. 캠프 축제무대에서 춤추는 3기 졸업생 인준이. 옹골찬 고향 친구 간호사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대안교육이 제도권 교육과 대립되거나 맞선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특별하고 별난 교육이 아니다. 제 각기 색깔과 향기를 품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맞는 배움 틀과 환경을 아이들과 교사와 부모가 함께 만들어보자는 게다. 그렇기에 대안교육은 높은 지적 각성과 풍부한 재원으로 한 순간 채워지지 않는다.

따또와 셋넷이 세운 대안교육이란, ‘개개인이 자기 삶의 중심에 서는 자존(自存)의 힘을 키우는 배움이고, 다름과 차이의 삶들을 이해하는 소통의 힘을 기르는 배움’이다.     


깨우침과 소통의 기본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존재는 한 사람 개인이다. 우리 근현대 역사는 집단에 익숙하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 시대를 거쳐 오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생존전략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집단 속 개인은 분열되고 이중적으로 병들게 된다. 개인 이해와 집단 목적이 같지 않고 개인 욕구가 집단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개개인에 주목한 이유다.      


‘자존(自存)’은 내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과 먼저 만나고 소통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도 있겠지만, 부끄러워하거나 감추고 싶은 나들이 더 많을 것이다. 부모 영향이든, 성장기 상처든 간에 이러한 나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과 세상 사물들과 건강한 소통을 할 수 있다. 흔히 자신과 소통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병들고 분열된 삶을 산다. 병들고 분열된 내가 만나고 소통하는 세상이 온전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잘사는 부모, 좋은 학교,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이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그저 조금 편한 일상조건일 뿐이다. 금융회사에서 일할 때 그랬다. 한국에서 최고 연봉을 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하고픈 일과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족해도 기쁘지 않다. 행복은 목표나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며 현재 진행형 상태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오래된 나들과 ‘지금여기’에서 정답게 소통하느냐가 행복의 관건이다.  


그대는 내가 아니다

건강한 한 사람 개인을 통해 세상과 사람이 새삼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건 인간 존재가 변화된다거나 사회구조가 변혁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때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고작 내 삶을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4월 초 3박 4일간 서울에서 상주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 여행 길잡이 성표샘이 얘기했다. ‘망채샘은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을 했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 가슴 한 모퉁이가 서늘했다.     


여행 내내 그 말을 곱씹어보니, 내 안엔 늘 선악의 시선이 있었고 정의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마주했기에 잘못된 세상과 못된 인간들에 대해 늘 분노가 일렁였다. 때론 그 분노가 상투적이고 관습적 틀을 넘어서는 힘과 용기가 되었지만, 때때로 그 분노가 나를 치고 나를 어지렵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곤 했다. 거친 표현과 직설적인 말투를 알아차리고 늘 경계해야지 다짐하지만 곧 허물어지고 다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결국 나는 나 일 뿐 다른 존재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내 안에서 나를 배반하는 또다른 나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자각된 내가 타자의 다름과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와 너는 평화롭고 행복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편견과 차별로 관계를 왜곡시키고 소통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상처 받아 병들게 되면 나와 연결된 가족 집단 사회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힘으로 내면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찾고 소중하게 품어야 일상이 건강해지고, 되찾은 자존(自尊)의 힘으로 타자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자존(自存)할 수 있다.     


셋넷학교에서는 승리를 위한 게임 능력을 배우고 1등을 위한 경기 감각을 익히지 않는다. 성공을 향하여 늘 비교하고 셈하는 핏발 선 삶이 더 이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넉넉하고 따뜻한 놀이 삶, 자족적 삶의 태도를 연습하는 이유다. 잔뜩 주눅이 들거나 불안해하며 모방에 급급한 삶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세우고 내 고유한 표현을 나답게 드러내는 문화를 훈련하는 까닭이다. 셋넷이 늘 머물고 싶은 자존(自存)이 거기에 있다.  

   

중국 용정 의료봉사

1999년 여름 음흉한 의도를 갖고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봉사활동 장소 때문이었다. 난 의사도 아니고 그때까지 어떠한 봉사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용정’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온몸이 짜릿했다. 한줄기 해란 강이 흐르고, 기개 높은 푸른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 만주 벌판을 말 타고 달리던 선구자들의 기상이 넘치던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일주일 봉사활동을 마친 뒤 백두산 천지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무조건 가고 싶었고 의료지식과 봉사 경력이 전무했지만 역량을 과장해서 기어이 참가했다.    


지금이야 직항으로 한 시간이면 연길에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아침에 출발해서 어둠이 깔린 뒤에야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직항 노선이 없었을뿐더러 유일했던 중국 비행기들이 몇 시간씩 연착하기를 예사로 했다. 기다림에 지칠 무렵 연길공항에 도착했지만 입국절차를 밟는 동안 총을 들고 날카롭게 쏘아보던 중국 인민군대 서슬에 눌려 잔뜩 긴장해야 했다. 무례하고 오만했던 공항 중국 공안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나중에 셋넷 아이들이 들려준 중국 도피생활 시절 이들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직접 목격한 사건이 있었다.    

 

2006년 여름, 자원교사들과 함께 떠난 중국 여행. 도문 조중국경다리 뒤로 보이는 풍경이 북한 땅이다.


무릎이 꺾인 아이들

2006년 여름 셋넷 아이들과 교사들이 함께 중국 여행을 했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대련을 거쳐 연길 일대와 백두산을 본 뒤 베이징으로 가는 여정이었다.(셋넷다큐영상모음집1, 기나긴 여정Ⅱ, 2006) 

두만 강가 작은 마을 삼합에 가면 북한 회령이 내려다보인다. 회령이 고향인 아이들이 여럿이었고 고향이 아니라 해도 북한 땅이나마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다. 자원교사들까지 동행했던 제법 규모 있는 여행이었다. 삼합 정자에서 고향 땅을 건네 보는 아이들은 갑자기 숙연해졌고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10분이면 쉽게 갈 수 있는 고향땅이건만 갈 수 없는 머나먼 나라라니, 이런 기막힌 운명이 어디 있는가. 분위기를 바꿀 겸 근처 식당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다.     


워낙 외진 곳이고 외국인 관광객이 적었던 시절이라 순찰을 돌던 중국 공안이 찾아왔다. 식당 밖 저만치서 제복 입은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고향 땅을 본 감동으로 즐거워하던 애들은 식당 창문을 뛰어넘었고 미처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애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꺾인다는 표현을 그때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이들 모두 정상적인 대한민국 여권과 중국 입국비자를 받아서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었지만, 호기심과 무료함으로 방문했던 중국 공안 존재가 몸속 깊숙이 스며있던 공포를 한꺼번에 끌어냈던 게다.     

어릴 적 새겨진 몸과 마음의 상처는 회복하는데 오래 걸린다. 남한의 풍요와 자유로운 환경에서 금세 낫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본인이 자신의 어둠을 직접 마주하려는 용기가 필요하고, 천천히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끈기를 가지고 가까이서 도와야 한다. 탈북자나 탈북 청소년들 표정이 어둡고 태도가 소극적인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2014년 KBS 특별기획 ‘통일한국을 그리다’  촬영차 도문을 방문해서 고향 회령땅을 바라보는 철만이와 향이.      


목발 짚은 선구자 이영석

숙소가 있던 연길에서 봉사활동지 용정은 비포장도로를 차로 40분쯤 가야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꿈에 그리던 용정에 갔지만 실망이 컸다. 흘러야 할 해란 강은 보이지 않고 초라하고 지저분한 실개천이 겨우 흐르고 있었고, 지조 높은 일송정은 고사 직전 모습으로 애처롭게 버티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와 대한민국을 있게 했던 선구적 존재들의 자취와 기억을 이렇게 버려둬도 되나... 이젠 관심 갖고 돌볼 정도로 나라 힘이 갖춰졌는데 현재에 매몰된 채 아등바등 사는 우리가 한심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는데 목발 짚은 젊은이가 찾아왔다. 탈북한 어린아이들을 불법으로 숨겨주며 보호했던 이영석인데 2년 뒤쯤 하던 일이 발각되어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안산에서 그룹홈 다리공동체를 시작하면서 뜻밖의 인연을 지속했다. 셋넷 초기, 낯선 남한 사람들을 회피하던 탈북 청소년을 만날 수 있게 연결해주고 탈북 청소년 교육의 기본 방향과 틀을 짜는데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1999년 여름, 용정에서의 운명적 만남

이영석이 10대 전후 아이들 3명을 데리고 왔는데 북한을 탈출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난생처음 본 북한 사람이었고 내가 받은 충격은 컸다. 우리들 모습과 똑같았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였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으며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자라온 의식 속에 북한에는 온전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온갖 이상한 괴물들이 살고 있고 좀비들이 설레발치고 있어야 했다. 대학시절 품었던 비판의식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것이었고 사회 양극화 구조에 대한 것이었지 북한에 대해선 어떠한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반공교육과 국가보안법이 주는 공포와 자기 검열이 깊지 않았을까 변명해본다.        


탈북 아이들과 봉사활동 기간 내내 함께 보냈다. 의사가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틈틈이 애들을 신기한 듯 관찰하며 지냈다. 경계가 역력했지만 애들답게 금세 경계를 허물고 다가왔다. 당시 나눴던 얘기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애들이 왜, 어떻게 탈북했는지에 대한 얘기들은 애써 피했고 그래서 빨리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을 떠나기 전날, 남아있던 중국 돈을 모아 주고 잘 지내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그때까지도 탈북한 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되면 어떤 고초를 당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2년 뒤 그 애들을 다시 만났다, 영화처럼.      


* 제목사진은 2011년 여름, 울릉도 독도 평화캠프. 독도로 향하는 배에서 각자 만든 새와 나비들로 소망을 표현했다. 부모와 고향을 그리는 셋넷 망채들의 간절함이 이루어지는 그날, 평화의 땅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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