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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y 02. 2019

슬픔의 노래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5)


2001년 봄날, 일요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교회 마당에 용정에서 만났던 애들이 어색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순간 서로 알아보고 삼촌! 얘들아! 얼싸안았다. 이 년 전 단 일주일 만났을 뿐인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인연인가. 이후 1년 정도 매주 일요일마다 용정에서 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과 다른 어린 친구들 10여 명을 데리고 서울 곳곳을 돌아보며 같이 놀았다. 따또학교를 같이 했던 길벗 교사들이 휴일을 아낌없이 반납하고 동행했다. 이 아이들과의 추억과 아쉬움들이 훗날 셋넷학교를 세우게 되었을까 되짚어보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욕심 없이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었나 보다.    

 

왜 학교 이름이 셋넷이죠?

7년간 대안학교 경험이 있었던지라 따또학교 교사들은 좀 더 체계적인 만남과 교육을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지만 다들 각자 직업이 있었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탈북 청소년을 위한 정규형 대안학교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뜻이나 생각이 없었다. 2002년 봄, 제한된 여건과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셋넷교실’이고 최초의 탈북청소년 주말학교다.     


“왜 이름이 셋넷이지? 유치원 이름 같은데...”    


탈북자나 탈북 청소년은 남한에 입국하게 되면 두 가지 절차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먼저 국정원(국가정보원)에서 한 달 정도 심문을 받는다. 간첩이나 조선족이 탈북자로 위장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하나원(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세 달간 남한 적응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받고 정착을 위한 기본 준비를 한다.

    

하나원에 머무는 초등학생들은 지역 초등학교로 통학하면서 남한 또래 친구들과 통합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워낙 학력격차가 커서 하나원 내 임시학교인 하나둘 학교에서 3개월간 별도로 수업을 받는다.(2006년 한겨레 중고등학교 설립 후 통학식 위탁교육을 2009년까지 실시했다.)

이 임시학교 이름에서 셋넷교실을 떠올렸다. 하나 둘 다음에 셋넷이라는 디딤돌 개념을 떠올려 탈북 청소년 남한사회 진입과 초기 적응을 돕는 다리 역할을 하자는데 초점을 둔 것이다. 나중에 정작 셋넷학교라는 이름은 1기 재학생이 제안했고 전체 투표를 거쳐 정했는데, 그때 내가 제안했던 학교 이름은 투표에서 떨어졌다. 몹시 서운한 감정을 애써 감추고 학교 교훈을 짓는 것으로 위로했다.     


‘뚜벅뚜벅 당당하게! 사뿐사뿐 유연하게!’  

눈치 보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해서 세상의 다름들과 유연하게 소통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았고, 교훈을 등불 삼아 교육 커리큘럼을 엮었다.     

 

탈북 청소년들의 진정한 모교 ‘하나둘 학교’와 이름 없는 전사들

경험을 통해 볼 때, 탈북 청소년 초기 적응과 정착은 입국 후 6개월에서 1년 사이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래서 임시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하나둘 학교’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개월은 의무기간이기에 안정적 교육조건이 되고, 아직 돈에 물들지(?) 않았기에 교육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

하나원 퇴소 후 돈의 위력에 압도당해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빠져들거나, 고향에 남겨진 부모에게서 연락(중국 국경지대에 핸드폰이 터지는 장소에서 전화를 연결해주고 비싼 통화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이 오면 돈을 보내기 위해 막일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남한살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학습조차 중단하는 애들이 많았지만 강제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2011 셋 넷 창작극 4 ‘이제, 그 풍경을 사랑하려 하네.’ 홍대 공연 중 물질만능주의를 표현하는 장면


하나둘 학교에서는 지정된 정착지역에 있는 제도권 학교로 가기 전까지 다양한 적응교육과 기초학습을 진행한다. 준비 없이 섣부른 남한 청소년들과의 무모한 통합은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적응력과 문화수용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게다가 탈북과정 상처들을 조심스레 보살피고 새로운 생존조건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속성과정으로 알려줘야 하는 난제들이 있다.     


‘남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소통 감수성’을 주제로 한동안 특강을 했고 나중에는 셋넷학교 소개를 위해 하나원에 가서 매 기수마다 아이들과 만났는데, 하나원에서 실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한양대 인류학과 정병호교수와 그 제자들이었는데, 교육 전문성도 높았지만 2001년부터 5년간 숙식을 함께하며 보여준 헌신적 노력과 아이들에 대한 조건 없는 무한애정이 오래도록 인상에 남았다. 탈북 청소년 초기 적응교육의 진정한 선구자들이다.      


늘푸른학교

셋넷교실을 운영하던 2002년 당시 수유리에 있는 강북청소년수련관 전문위원으로 있으면서 대안 예술학교인 난나 학교(난나 공연예술아카데미)를 실험하고 있었고, 300석 규모 청소년전용 소극장(여해문화공간)을 책임 운영하며 왕성하게 기획과 연출 활동을 했다.  

비슷한 시기 청소년수련관 근처에 중산층 가정 환경을 갖춘 탈북 청소년 그룹홈(생활공동체) ‘늘푸른학교’가 문을 열었다. 하나원에서 하나둘 학교를 위탁 운영했던 남북문화통합교육원(현 평화디딤돌)에서 운영했는데, ‘셋넷교실’ ‘난나학교’ ‘늘푸른학교’가 밀접하게 교류 소통하며 다가올 셋넷학교의 꿈을 엮어가고 있었다. 훗날 몇몇 인터뷰를 통해 늘푸른학교가 셋넷 준비단계 학교로 기사화되었는데 잘못 전달된 것이기에 바로 잡는다. 셋넷학교가 탄생하게 된 건 똘배학교였다.   

  

교회

2003년 봄 장충동 K교회로부터 탈북 청소년 학교를 정식으로 제안받았다. 부적응 남한 청소년을 위한 두 개 대안학교와 셋넷교실을 직접 시도했고, 시민운동단체에서 대학생 청년들을 대상으로 했던 다양한 문화기획활동들이 주목받았기 때문이었다.

장공 김재준목사와 여해 강원원목사가 세운 교회는 내 인생과 분리시킬 수 없다. 내 삶이 진화했던 신체시간과 정신 공간이며 나를 성숙시킨 시대의 거인 멘토들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성스러운 거처였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니다. 

은퇴하는 강목사님 후임으로 온 목사와 신방과 교수였던 장로가 교회에서 탈북 청소년 학교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솔깃했다. 하지만 주일 봉사차원이 아니라 정규형 전일제 학교라면 내 삶을 던져야 하기에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나는 주저했다. 목사와 장로는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급여를 약속했고 나는 경건하게 선택했다.    


지역과 일상을 살리기 위한 선택

나는 교회주의자나 독실한 신앙인이 아니지만 한국 상황에서 교회가 감당할 역할이 크다고 믿었고 희망을 걸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니다. 90년대 중반 대학로에서 젊은 연극인들과 새로운 문화운동을 설계하면서, 평일에는 비어있는 교회와 예식장을 문화공연장으로 개방해서 생기를 잃어가는 지역과 일상을 되살리자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어떠한 종교 공간도 일상과 분리된다면 회칠한 무덤과 다를 게 없다. 교회 공간에 300석 청소년공연장을 운영하여 갈 곳 없는 청소년에게 창조적 문화를 체험하게 했고,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를 교회에서 해보자는 제안에 삶을 던진 이유였다. 대다수 탈북 청소년 학교를 교회에서 운영했던 목적이, 통일시대 북한선교를 위한 십자가 군병을 양성한다는 것과는 동기와 취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주 작은 규모가 아닌 교회라면 여러모로 유용한 공간들이 많고, 교인들에게 강요하는 십일조 약속을 교회가 지킨다면 매주 헌금으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다양하고 유능한 인적 자원이 넘쳐난다. 교회가 깊고 어두운 잠에서 깨어나 사회와 일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한국교회가 있으니 부자들은 안심해도 될 듯싶다.


2004년 4월 검정고시를 마친 뒤 똘배학교 마지막 여행(변산 하섬). 사진 속 망채들 대부분 한국에 없다.


똘배학교

2003년 5월부터 다양한 나이와 직업 배경을 지닌 30여 명의 사람들이 매주 모여 공부하며 개교 준비를 했다. 12월 25일 여해문화공간에서 똘배학교 개교식을 했는데, 고인이 되신 강원용목사님은 ‘내가 탈북자 1호’라며 감격하셨다. 이미 탈북 청소년들을 돕고 있던 학교들이 있었지만 공부방 수준이었고, 정규형 전일제 탈북 청소년 학교로는 처음이었던지라 사회적 차원에서 많은 축복과 기대를 받았다.


‘똘배’라는 이름에는 적응력과 번식력이 뛰어난 야생돌배나무처럼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학생은 10대 후반 탈북 청소년 10명에서 점차 늘어났고 자원교사들 열정 또한 뜨거웠지만, 2004년 4월 검정고시를 마친 뒤 희망으로 가득 찼던 배는 갑작스레 난파했다.   

목사와 장로가 약속했던 학교장 급여를 교회에서 줄 수 없다고 돌연 통보했다. 두 명의 어린아이와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기였다. 게다가 교육 커리큘럼에 성경공부와 예배시간을 넣으라고 교회가 일방적으로 트집을 잡았다. 후임으로 이미 내정된 분은 여자 장로였는데 은퇴한 중학교 교장이었다.


 똘배학교는 얼마 가지 않아 학교를 닫았고 애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4월 말 학교를 그만두며 담임목사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8월 검시를 앞두고 아이들이 동요하니까 잘 부탁한다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그 애들 니가 데리고 나가라. 통일부에 전화 한 통 하면 탈북 청소년 20명쯤은 금방 보내준다.’ 그 목사는 김대중정부에서 통일정책에 깊이 관여했고 영향력이 있어서 그런 만용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탈북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던 저급한 무리들이 벌였던 정치쇼에 불과했다.      

  

선교라는 신성한 도구를 오로지 교회를 확장하는 속된 도구로 활용해서 대부분 한국교회들이 부흥했지만, 교회마저 이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 갈 데 없고 도움받을 사람 없는 탈북 아이들에게 십자가를 강요하다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무조건 사랑에 조건을 거는 타락한 교회와 비겁한 목사와의 싸움은 치졸했고, 뜻을 같이 하는 교사들과 미련 없이 떠났다. 동요하는 아이들이 다시 상처를 받아 무너질 듯 미안했지만, 나눌 수 있는 건 슬픔뿐이었다. 당시 일기에 그러한 심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 김훈, 칼의 노래

   

1월, 거짓과의 싸움은 힘겨웠고 2월, 속임수와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3월, 실체는 보이지 않고 악의에 찬 수군거림으로 가득한 이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증오는 지나간 모든 증오와 전혀 다른 낯선 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무의미했고, 지나간 모든 위선과의 싸움은 닥쳐올 모든 슬픔 앞에서 무효였다. / 박상영, 슬픔의 노래1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연민과 서정을 모두 걷어낸 자리에서 겨우 드러나는 세계의 알몸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사내의 무기는 언어가 아니라 칼이라야 마땅했다. / 김훈, 칼의 노래

   

나는 교회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더러운 믿음을 말하지 않고, 정치적 소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사랑에 기대지 않고, 정의 없는 세계를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거짓과 속임수를 모두 걷어낸 자리에서 겨우 드러나는 교회의 알몸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사내의 무기는 언어가 아니라 칼이라야 마땅했다. 나는 칼의 정직함과 칼의 몸 된 실천과 얕은 술수로는 돌이켜지지 않는 변함없는 칼의 처음 사랑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여 내 사내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큰 울음이라야 마땅했다. 칼이 품은 깊은 슬픔이라야 마땅했다. / 박상영, 슬픔의 노래2      


  

* 하나둘학교, 늘푸른학교에 대한 내용은 윤상석샘(공존플랜 소장)의 도움을 받았다. 윤샘은 하나둘학교, 남북문화통합교육원, 늘푸른학교를 거쳐 무지개청소년센터 부소장으로 근무했다. 남한에서 탈북 청소년 교육의 최고 고수이자 셋넷의 영원한 멘토다.  


* 제목사진-2016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공연 ‘철망 앞에서, 하나를 위한 이중주’... 도종환 시 담쟁이를 집단 마임으로 형상화했다. 시 내용이 셋넷들이 살아야 할 삶을 닮아있어서 애틋한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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