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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y 16. 2019

평등하고 따뜻한 소통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마음의 품삯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6)


셋넷학교는 2004년 9월 10일 개교했다. 4월 말 똘배학교에서 나온 뒤 한 달을 내내 앓았다. 워낙 짐승처럼 건강한 체질이라 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는데 뚜렷한 원인과 증상이 애매한 채 아팠다.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오르내리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온몸이 쑤시고...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만 있다는 화병이었다.    

 

셋넷을 세운 독수리 5남매

5월 말쯤 찾아온 똘배 시절 교사에게서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상당수 애들이 8월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똘배학교에서 나왔기 때문에, 공부할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햄버거 가게나 커피숍에서 교사들과 개인학습을 하고 있었다. 

가게 영업방해를 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지도했던 수상한 교사들은 민수, 대일, 문수, 보미다. 똘배학교를 같이 시작했고 거리에서 셋넷을 함께 세운 천하무적 드림팀이다. 나이, 전공, 성격과 삶의 철학이 모두 달랐지만 어렵던 시절 희망과 슬픔을 나누면서 셋넷의 밑돌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셋넷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문수샘을 제외한 독수리들은 셋넷 둥지에 없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모여들게 마련(말의 품격, 이기주)’이라는데, 솔직함과 무례함을 오용했고 남용했던 나의 큰 잘못이었다.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을 지켜만 볼 수 없어서 NGO 시절 인연을 맺었던 원불교 교무에게 다급하게 부탁했는데 바로 응답이 왔다. 아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인근 교당을 연결해줬고, 달려가 만난 교당 책임 교무님은 아무런 질문과 조건 없이 교당 본당과 취사시설을 선뜻 내어주셨다. 

종교가 뭐냐고 묻지도 않고, 구석진 공간을 마지 못해 내주지도 않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내가 찾던 종교와 공간의 참모습을 비로소 보았다. 원불교는 그 후 셋넷이 뿌리를 내리고 정상적인 조직을 꾸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근본주의 개신교회들이 운영하는 학교 교장들로부터 원불교 교인이 탈북 청소년 학교에 잠입했다는 저급하고 한심한 얘기를 들어야 했다.  


2004년 가을, 동숭동 반지하 학교. 뒤편 벽에 붙인 달걀판과 시간표가 보인다.


북조선 학교보다 후졌던 남한 학교에서 커가는 사랑과 꿈

셋넷 첫 둥지는 대학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반지하였다. 아이들 문화적응교육과 자원교사의 원활한 방문을 위해 위치가 적당했지만, 10년 넘게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했기에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요청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K교회로부터 크게 배운 바가 있어 그 무엇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오른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왼손이 알아야 했다.   

  

창고로 설계되었기에 기둥만 몇 개 있고 난방과 온수시설이 없었고, 천정이 낮아 구부정하게 들어가야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나눠진 방과 문이 없었기에 굵은 철사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서 천으로 가린 뒤 수준별 수업(기초, 고검, 대검)을 했고, 남은 구석진 공간에 책상 하나 놓을 교무실을 겨우 구분했다. 수업 소리들이 서로 들릴 수밖에 없었고 학교 전화라도 울리게 되면 재빨리 밖으로 나가서 받아야 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모두를 힘겹게 했지만, 도무지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융통성 없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쩌지 못한다. 공모사업에 사업기획서를 내서 필요한 예산들을 그때그때 채웠지만 늘 재정적으로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체를 꾸려갈 대표 자격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 와중에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지하 창고라 울림 현상이 너무 심했다. 가뜩이나 천으로 벽을 대신했기에 온갖 소리들이 충돌하며 마구 떠다녀서 영화 세트장 같았다. 마침 건물 1층에 달걀 도매상이 있어서 달걀을 팔고 남은 받침대를 얻어왔다. 종이를 짓이겨서 만들었기에 그런대로 방음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들며 함께 달걀판을 벽에 붙이는 방음 작업을 했는데... 아이들이 나누던 대화에 그만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잘 사는 남한에 와서 북조선보다 못한 학교에 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며 한 아이가 자조 섞인 말투로 한숨을 쉬었다. 개교식 날 학부모 한 분이 참석하셨는데 하도 기가 막혔는지 이런 게 학교냐고 대놓고 따졌다. 지금 돌이켜봐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반지하에 따라와 공부하기로 한 애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멋진 학교시설보다는, 탈북 아이들을 조건 없이 이해해주는 순수한 사람들로 가난한 학교를 채웠다. 그렇게 지상에서 낮고 허름한 곳에서 셋넷의 배움이 시작되었다.


2010 봄, 해남캠프. 신기교회와 유기농 농사를 하는 부부 도움으로 3주간 문화소통 활동과 직업체험교육을 진행했다.


‘모자람도 넘치지도 않는’ 냉정과 열정 사이

2004년 가을 무렵에는 탈북 청소년의 남한 적응을 돕는 대안학교가 매우 적었고, 제도권 학교에서는 전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갑자기 남한에 밀려들어오는 탈북자나 탈북 청소년 정착을 위해 국가나 시민사회단체들의 대비가 매우 부족했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다가간 건 개신교 쪽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북한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런 활동의 후속작업으로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나 탈북 청소년을 위한 정착지원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중국 연길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한 은신처(shelter)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은, 작은 방 한 칸에 앉은뱅이책상이 다였다. 책상 위에는 성경책 하나만 놓여있었는데 고풍스러운 문체나 낯선 단어들을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늘 품고 계셨던 성경책이 떠올랐다. 셋넷 초창기 아이들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선교사나 목사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남한으로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남한 표준어로 된 전래동화책이라도 읽게 해 준다면, 막연하게 기다리는 동안 후일 남한 적응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얘기했지만 그런 책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외면당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돈을 받고 탈북자를 남한으로 탈출시키는 전문 중개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탈북자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남한에 들어왔다. 북한과 형제의 의리를 내세우고 살벌한 공안 감시체제를 유지하던 당시 중국 상황을 감안할 때 목숨 걸고 탈북을 도왔던 종교적 사명과 용기는 대단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종교적 미션과 사랑이 탈북자나 탈북 청소년의 남한 정착에 무분별하게 개입한 것은 아이러니다. 은신처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탈북과정부터 잘 알고 있기에 남한에서도 자신들이 전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막무가내 논리였다.     


아이들 성장기 문제들로 다양한 배경을 지닌 남북한 부모들과 상담을 많이 했다. ‘우리 애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면서 상담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부모들이 의외로 많았다. 부모의 일방적 확신과 독선적 사랑이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어른이 되어 가족을 꾸리고 나서도 그 아픔과 비극이 확대 반복된다는 것을 교육현장에서 수없이 경험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반유대주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히틀러가 성인이 되어 벌인 비극을 떠올려보라. 탈북 청소년 남한 입국초기, 폐쇄적인 종교 환경 때문에 분열된 삶을 살면서 오랫동안 방황하는 탈북 청소년들을 안타깝게 지켜봐 왔다.    

 

‘많은 교회가 북에서 온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 목적이 선교를 위한 것이나, 전도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중국에서 일 년 반 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무릎 꿇고 성경을 읽은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주입식으로 믿어 온 상태라 곧 믿음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고, 교회라고 하면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쓰려고 하는 게 아닐까를 늘 생각하게 만들었다.’ (1기 졸업생 금희, 꽃이 펴야 봄이 온다.)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 자녀 등 이주청소년들 특수성을 이유로 정착해야 할 국가의 또래 아이들과 통합교육을 시키지 않고, 그들만으로 분리된 교육시스템을 구축한 나라에서 행복하게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종교가 해야 할 사랑과 돌봄의 역할은, 정착과 적응을 위해 필요한 사회지원체계나 전문교육영역과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어떠한 사랑과 은혜로움도 ‘모자람도 넘치지도 않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기억하기를... 종교문제라면 일제히 침묵하는 우리 사회가, 적대적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다문화시대에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할 해묵은 과제다.     


평등하고 따뜻한 소통을 위한 전제

자원봉사자나 방문자들은 아이들과 소통하고자 할 때 셋넷에서 제시한 서약서에 반드시 사인을 하고 언행에 대한 공적 책임을 약속해야 한다. 외래어나 한자어를 가급적 쓰지 않는다, 남한 표준어인 서울말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 고향 말을 존중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이들에게 탈북한 이유와 경로 등 탈북과정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묻지 않기로 약속을 해야 한다. 사실 자원봉사보다는 북한 사람과 탈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래된 남북한 대결구도와 반공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문제는 함부로 던지는 궁금한 질문들이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게다. 탈북과정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을 겪거나 몹쓸 짓을 당하거나 목격하기도 했던 기억들을 강제로 불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함께 건너다 떠내려가는 엄마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던 아이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의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을 게다. 더구나 남한 입국 후 정보기관에서 혹독한 심문 과정을 겪는다. 간첩을 가려내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명분이라 해도 어린 나이 청소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기억임에 분명하다.    

 

자원봉사자들은 빨리 친구가 되고 싶고, 그러려면 애들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질문을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며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들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한다. 바로 그 순간이 당신과 친구 하고 싶다고 닫힌 마음을 여는 걸음마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온갖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고 버림받은 기억들로 가득 찬 아이들은 또다시 상처 입고 싶지 않다. 마음 열고 관계를 맺는데 긴 망설임과 깊은 의심을 하는 까닭이다. 


2005년 여름캠프, 변산 원광대 임해수련원.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어울려 노는 게  남북의 벽도 훌쩍 뛰어넘는다는 걸 느꼈다.


‘마음의 품삯’

친구나 지인들을 만날 때 화제는 단연 셋넷 아이들에 대한 것들이지만 정작 아는 게 없다고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애들 몇 명 되지도 않고 명색이 교장이라는 자가 학생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준다. 셋넷이 경찰서냐, 정보부냐, 왜 내가 애들 탈북과정을 알아야 하냐고 되받는다.     


셋넷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은 반드시 면담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면담 내용이란 학습 수준을 체크하며 성실하게 공부할 것인가를 묻고, 탈북과정에서 워낙 몸을 상한 애들이 많은지라 몸 아픈 데는 없는지 살피는 정도지 탈북 이유와 과정을 묻지 않는다. 종교를 입학 요구조건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도 다른 학교들과 다른 점이다. 그저 애들이 어느 날 자신들이 살아온 기나긴 여정을 얘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하는 게 고작이지만, 그 때문에 작고 초라한 셋넷에 와서 편하게 머물게 되었다고 훗날 얘기하는 얘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살아온 얘기들을 듣고자 한다면 최소한 한 계절 정도는 진정으로 만나고 함께 캠프도 가는 수고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참된 우정과 사랑을 만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마음의 품삯’이 아닐까 싶은데 우린 너무 바쁘고 급하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배려하기보다는 내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고 일방적으로 소통하려 든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 제목 사진 - 2007년 셋넷 창작극 1 ‘나의 길을 보여다오!’ 이대 뮤지컬 공연. 아이들 탈북 여정을 뮤지컬 형식으로 표현했고, 자원교사들이 코러스와 라이브 밴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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