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1. 나의 경우: 너무 큰 불행은 당신에게 공개할 만하지 않았음을
나는 우아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너에게 동생이 있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생 이야기를 하지 않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지면 ‘그 사실이 내게 이런 영향을 미친다’ 정도로 털어놓을 줄은 알게 되었다. 나는 동생의 장애와 그로 인한 우리 집의 곤란을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공개하는 데에 노련했다. 위로해줄 만한 슬픔, 참아 줄 정도의 불행만을 편집해 내보이는 건 내 장기였다. 사람들이 말문을 잃는 순간 내 가족의 현실을 좀 더 거시적인 차원의 논의에 편입시켜 우리가 한결 편하고 고급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도록 흐름을 조정할 정도의 말재주는 있었다.
그게 정말 상대방을 위해서였을까. 아니 나는 그냥 당신이 나를 대할 때마다 지적장애인 동생을 떠올리는 게 싫었고 나와 대화하면 뭔가를 조심하거나 위로해 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다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게 싫어서. 걱정 마세요, 당신에게로 뭔가 무겁고 질척거리고 구질한 것이 넘어가지 않도록, 이렇게 안전선을 그었고, 잠깐 구경시켜주고 싶을 뿐이었고, 얼른 다시 집어넣을게요. 매끈한 멘트로 맥락을 정리하고 별 거 아니라는 듯 힘껏 웃어 내가 몰고 온 먹구름을 걷어내곤 했다.
언젠가 ‘왜 너는 네 얘기를 그렇게 남 얘기하듯 하냐’는 핀잔을 들었다. 동생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나의 ‘말끔한 말버릇’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매사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남 얘기하듯 말하지 않으면, 당신과 나는 이 밝은 카페에서 사람 많은 술집에서 갑자기 해답 모를 문제에 질식할지도 몰라. 내가 이 모든 것에 의연하게 최선의 태도로 대처하는 인간이라 덜 부끄러웠다면, 나는 동생의 일을 자연스럽게 나의 일부로 받아들였을까? 아니 혹시 그랬더라도 나는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보다는 평범하고 친근하게 매력적인 인간으로 사랑받고 싶어 했을 거다. 굳이 나의 장르를 선택하라면 휴먼 다큐멘터리 말고 인기 드라마나 주말 예능이고 싶다.
김원영의 책을 읽다가 깨달았다. 그토록 많은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도, 차별과 젠더와 민주주의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도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책을 읽지 않았다. 그 주제가 내 삶의 중심부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직접적으로 장애와 관련된 자료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결국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흔드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장애라는 키워드가 내게 상기시키는 것은 유행 지난 가구와 좁고 남루한 건물과 유치하게 화려한 프린트물과 조악한 문구와 그리고 세련되지 않은 너무 많은 요소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는 전문적이지 않고 체계적이지 않고 충분히 강력해 보이지 않는, 변방의 센터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내 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한, 장애인 학생에게 둘러싸인 선생님들…. 선량한 피해자란 말이 얼마나 지극한 형용모순인지 끊임없이 내게 알려주는, 남들처럼 흔한 속물적 욕망을 지녔는데 절대로 스스로의 기준을 만족시킬 삶을 갖지 못할 나의 동생…. 사랑과 희생은 고사하고 평범한 대화 상대조차 되어주지 못하며, 실은 잘난 척 평등과 공동체를 말할 자격 따위 없는 위선적인 나…. 누구보다 열심히 동생을 싫어할 뿐인 나…. 도망가고 싶어 하는 나….
기자를 지망할 때조차 나는 장애라는 주제를 나의 ‘무기’로 삼지 않았다. 동생 이야기로 글을 썼던 첫 작문 수업에서 ‘이 글은 소재만으로도 토익 990점 만점에 950점을 먹고 들어가는 글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랬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의상학과 전공이라 받는 의심은 좋은 동력원이었다. 동생의 장애는 내가 차별과 공정에 관심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에 너무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동기였음에도, 구직 과정에서 그놈의 스토리텔링이란 너무나 중대한 것이었음에도, 나는, 한 번도 장애를 내 자기소개서의 중심에 배치하지 않았다.
김원영은 장애인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고 썼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 형제 모임 ‘나는’에서 펴낸 책을 예시로 들었다.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는 문장이 이렇게도 정확히 나를 겨냥한 순간이 있었던가. 언젠가는 쓰겠지, 언젠가는 쓰게 될 거야, 막연하게 생각해왔는데 김원영의 문장을 읽자 ‘언젠가’가 ‘반드시’로 변해 숨을 턱, 막았다. 쓸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써야 했다. 해결하지 못했으니 쓸 자격도 쓸 내용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잘 쓸 수 있는지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 우리 집처럼 부서지고 닳아 가는 다른 집을 위해서라도 써야 했다. 세상에 이런 삶이 있다고 보여야 했다. 할 줄 알면 해야 했다.
내가 배운 그 잘난 이론과 지식들은 정작 내가 처한 상황에는 활용되지 못하고 매 순간 잊혔다.
김원영의 책을 꿰뚫는 키워드는 ‘잘못된wrongful 삶’. 장애인의 출산으로 제기되는 소송을 ‘잘못된 삶 소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왜 이런 아이를 낳게 했느냐’, ‘왜 이런 나를 낳게 했느냐’가 주요 공방 논제다. 김원영은 끊임없이 장애인을 낙태하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조차도 자신과 같은 장애를 지닌 아이를 낳게 된다면, 혹은 낳을지 선택해야 한다면, 아이가 장애를 갖지 않기를 원할 것 같다고. 그나마 이 정도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딜레마고 들려줄 만한 갈등이다. 들려주지 못할 만한 것은 무엇이냐고? 얇은 벽을 뚫고 엄마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 나를 향해 달려오는 100kg의 거구를 피해 방문을 닫아 잠갔을 때,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바로 당신에게 들려주지 못할 만한 것이다.
김원영을 보면 이런 사람이 내 형제자매였다면 나는 손쉽게 외부에 분노하기만 했으면 되었을까 생각한다. 장혜영을 보면 동생의 장애가 아예 심했거나 나와 성별이 같았다면 나도 저럴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내 생각은 틀렸고 그저 그들이 강인한 인간이라 사회로 저렇게 걸어 나올 수 있었음을 안다.
2. 그 애의 경우: 정상성에서 벗어난 신체 역시 욕망받기를 원한다
‘누나, 남자친구 있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동생 역시 연애에 관심 있는 흔한 20대임을 깨닫는다. 연애에 관한 나의 복잡한 고민을 차치하더라도, 동생과 연애를 연결 짓는 순간은 매번 곤혹스럽다. 나는 누군가 동생에게 성적 매력을 느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장애는 오래될수록 다른 증세를 주렁주렁 달고 복합적인 문제로 변해간다. 동생의 지적장애는 우울증, 피해의식, 대인기피증, 비만, 과민성 대장증후군, 피부 트러블, 불균형한 식습관 같은 다른 문제들을 줄줄 끌고 왔다. 종종 내가 동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이유가 지적장애가 아닌 그의 외양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성적인 듯 말하는 세상의 모든 유미주의를 참수하고 싶어 진다. 겨우 그딴 것 때문에. 그딴 것 때문에.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동등한 존재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쉽다. 장애인을 자주 대하지 않아 처음에는 낯설더라도, 배우고 익숙해진다면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것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건? 매일 보는 친구가 되는 건? 깊은 관계를 맺는 건? 나는 내 동생 외의 다른 장애인을 내 삶에 깊숙이 들인 일이 없다. 연인으로 상상해 보는 건 고사하고 친구조차 된 적이 없다. 그들이 정상적인 신체를 지니지 않아서인가, 만일 겉으로 티 나지 않는 장애만 있고, ‘정상적’인 신체, 심지어 그 기준으로도 매력적인 신체를 지닌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는가? ‘장애’까지 가지 않더라도 키가 너무 작거나 너무 비만인 사람을 내가 연애 상대로 상상하지 않는 것을 그저 ‘취향’이라고만 말해야 하는가? 본능이라는 편리하고 반증 불가능한 말로는 절대 합리화해 주고 싶지 않다.
‘정상적’인 신체만을 사랑하는 문제.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가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낄 때조차 끊임없이 그 문제가 마음에 굴러다녔다. 내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일단 ‘정상성’에 부합하는 신체를 지녔고 심지어 꾸준히 운동해서 탄탄한 몸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고 원인 모를 질병으로 인한 냄새도 나지 않아서일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니 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에서 김원영의 말을 발견했다. 숭고하고 훌륭한 장애인 말고, 야하고 매력적인 장애인이고 싶다고. ‘다른 아름다움’을 발굴해내고 익숙해지다 보면 분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김원영의 책을 찾아 읽은 건 사실 그 대목 때문이었다.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읽은 대목은 매력에 대한 내용을 다룬 8장이었다. 그가 아무리 지적 소양을 쌓아도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몸의 문제.
매력의 기준이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력적인 사람에게 끌린다. (중략) ‘신체의 아름다움’은 한 인간의 매력을 도출하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비교적 그 기준이 명확하다. (250쪽)
우리의 노력으로 평등을 위한 법과 윤리,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일상의 규범을 구축해나가더라도, 매력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이 소외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253쪽)
신체를 혐오하거나 피하고, 그에 무심하거나 편견을 갖고, 그것을 욕망하는 모든 일은 단순하고 1차원적인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중략) 근육병과 골형성부전증에 따라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267쪽)
8장에는 유난히 ‘모르겠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김원영은 심지어 ‘모든 것이 변론 가능하지는 않다’고 쓴다. ‘차별 감정의 철학’과 ‘사람을 싫어하는 것’을 쓴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역시 생리적인 혐오감에 대해서는 논의를 보류했다. 인간은 아름다운 몸에 끌리지만, 분명히 그것은 우리가 논의해 온 정의나 공정이나 PC함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 끌림이 사회적인 차별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로 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적인 관계에서 신체의 매력이 차별 요소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원영은 그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른 매력을 발굴하는 것이 가능하고, 오랜 시간과 신뢰 끝에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희망을 제시할 뿐이다.
김원영의 글을 읽고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의 글을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렇다. 억지로 좋아할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을 좋아하지는 말아라, 차라리 그것을 투명하게 인정하는 편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을 위해 함께 고민하자. 그렇다면 동생을 존중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되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 삶의 저자임은 인정하되 억지로, 의무로 관계를 형성하려 하지는 말기로 한다. 나를 괴롭히지 말고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하기로 한다.
왜 이 책을 이제야 읽었을까. 나도, 동생도, 김원영도, 숭고한 인간승리의 주인공보다는 친해지고 싶고 사귀고 싶은 일상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어 편애받고 싶다. 우리는 훌륭한 인간 말고 사귀고 싶은 인간이고 싶다.
202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