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 서간문 17회에 대한 감상
지난 수요일, 주간 문학동네에 올라온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고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참 다정하고도 단호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전에 없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17회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 곧 무료로 읽지 못할 글이라니 지금 읽어두는 것을 추천한다. 혹시 단행본으로 나온다면 나는 반드시 구매할 예정이다.
이 글의 훌륭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따뜻한 우정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는 점이고, 둘은 작가의 논리적 표현력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는 점이다.
첫째, 연재 내내 동료를 향해 '자아도취적인 느끼한 글은 그만 쓰라'는 불호령과 '서간문이란 상대를 생각하고 질문을 건네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솔선수범을 건넸음에도 또다시 자기 이야기만을 쏟아낸 동료를 향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인내심을 발휘해서 조언을 건네는 우정.
처음 읽었을 때에는 '남궁인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X당할 만큼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공개 서간문 연재에서 이런 글을 받았다면 아마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떨렸을 거다. 하지만 주말이 되어 이 연재를 차근차근 정주행 해본 결과... 남궁인은 좀 잘못했다.
사실 잘못했다기보다는 글을 못 쓴 건데(이 연재가 서간문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는 너무나 자기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회생의 여지가 없진 않았는데(남궁인의 글 중에서는 6회가 가장 좋았다. 이슬아에게 가장 뚜렷하게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 본인이 어느 포인트에서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인세를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한 데에서 치명적으로 잘못했다.
이런 정중하고 정성스러운 조언 정도는 감수하셔야 할 것 같다. 좀 아프시겠지만. 덕분에 당신들의 연재를 지켜보던 저 같은 비루한 인간도 함께 가르침을 얻었으니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능력이 이슬아 작가보다 부족한 사람은 남궁인 작가뿐만이 아니니까요.
어딜 봐서 우정이냐고? 아니, 우정이다. 나는 이들의 서간문 연재를 다시 읽으며 이슬아가 남궁인을 향해 애틋한 문장을 그렇게 많이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연재를 통틀어 이슬아가 남궁인에게 동료 작가이자 친구로서 건네는 말을 내 맘대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선생님의 글은 좀 느끼하지만 그래도 우리 같이 살아서 더 좋은 글을 써 봅시다, 우리 서로의 구림도 잘 말해주는 좋은 우정을 쌓아 봅시다'.
"잘 싸운 뒤 만회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우정에 진입할지도 모른다."
0회, 연재를 시작하며, 2020-12-23
"선생님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전혀 느끼하지 않거든요. (중략) 의사로서 쓰는 글도 느끼하지 않습니다. (중략) 하지만 선생님의 사랑 편지는 느끼합니다. 수신자 말고 발신자만 선명한 편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대상 말고 사랑하는 나에게 심취한 문장으로 느껴집니다."
1회, 멋지고 징그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2020-12-30
"이 편지를 읽고 선생님이 저랑 절교할까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답장을 주신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더 좋은 우정의 세계에 진입할 것입니다. 그 가능성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1회, 멋지고 징그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2020-12-30
"선생님의 답장을 읽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느끼함과 느끼함을 이겨낼 힘을 동시에 주는 당신'"
3회, 느끼하지만 고마운 남궁인 선생님께, 2021-01-13
"저는 남궁인 선생님이 살아 있는 게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 편지를 기다리고, 읽고선 따박따박 따지고, 그러다 사과하고, 하나의 글 안에서 여러 인격을 들키고, 놀리고, 조롱하고, 걱정하고, 선물하고, 소중한 이야기 중 하나를 꺼내놓고 그에 따르는 슬픔도 덧붙이고, 금세 농담을 하고, 편지를 보내고, 또다시 답장을 기다립니다. 선생님이 살아 있어서요."
9회, 간혹 스텝이 꼬이는 남궁인 선생님께, 2021-02-24
"저의 글 역시 재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을 텐데요. 새롭게 고치면 좋을 표현을 발견하신다면 꼭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선생님께 공들여 하듯이 말이에요."
11회, 남궁 성씨를 빛내는 남궁인 선생님께, 2021-03-10
"남궁인 안에서 이슬아는 어떻게 새로워졌습니까? 이것은 부지런히 남궁인을 통과하고자 노력한 친구의 질문입니다."
17회,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2021-04-21
둘째, 이 마지막 조언이 결코 느낌적인 느낌에 기반한 실체 없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혹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메세지를 알아듣지 못할 것을 우려해 친절하게 데이터 자료를 생성하고 첨부하는 논리적 표현력.
과연 이슬아의 저 글은 편지일까, 에세이일까, 논문일까, 르포일까? 이슬아가 이번에 쓴 논픽션을 보면 장르의 구분 같은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부디 이슬아를 에세이 작가라고 부르는 건 그만하자.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를 그렇게 납작한 말로 부르지 말자. (과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명확한가에 대한 이슬아의 고찰도 매우 탁월하나 이건 나중에 따로.)
누가 문학동네 서간문 연재에 그래프 자료가 등장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데 당연히 안 될 이유는 없다. 사람들은 논픽션 글을 수필/평론/기사/논문 등등으로 나누곤 하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은 그 분류를 뛰어넘는 글을 쓴다.
나는 진짜 좋은 글은 정확한 문장과 논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수필이 곧 정보값 없는 글을 의미하는 것 같지도 않고, 기사의 문장은 무조건 딱딱하고 건조한 것 같지도 않다. 그건 편견이다.
나는 기자가 되면 재미없는 글만 써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신문을 읽기 시작하자 그 안에 감동적인 문장이 무수히 많음을 알게 됐다. 그런가 하면 이번 이슬아의 서간문은 또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포착하는 정보를 알차게 담고 있는가.
'누가 더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글을 썼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슬아는 세 가지 데이터를 수집했다. (1) 상대와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의 수, (2) 상대와 자신을 의미하는 주어의 수, (3) 상대에게 건넨 질문의 수. 그리고 (1)과 (2)를 합쳐 각자가 '상대방'과 '나'를 지칭한 총 횟수를 도출했다. 위의 그래프에서 '상대방'과 '질문' 항목이 붙어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두 가지는 결국 '상대방을 생각한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니 붙여서 보는 편이 나았을 텐데... 혹시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압도적인 차이라서 일부러 시각적으로라도 떼어 놓은 거라면 이슬아는 정말 배려갓이다.
어떤 답장이 올지는 모르겠다. 나는 남궁인 작가가 이 글에 상처 받아서 절교 운운... 하기보다는 이번에야말로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답장'을 보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연재문을 읽으면서 나는 남궁인이라는 사람 역시 꽤 좋은 작가라고 느꼈으니까. 그 역시 이슬아의 장점이 무엇인지 잘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이 서간문 연재만으로는 내가 알 수 없는 둘만의 우정의 세계가 또 있을 테니까.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그에겐 결정적으로 제가 범접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구린 걸 구리다고 매우 능숙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0회, 연재를 시작하며, 2020-12-23
"그러고 보면 저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 또한 주로 작가님이 묻고 제가 답하는 형식이지요. 일단, 저에 대해 너무나 정성스럽게 궁금히 여겨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그 궁금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슬아 작가를 늘 놀랍고 새로운 세상에 깊이 빠질 수 있게 하는 것인가요? 또한 우리는 평생 사랑하는 한 사람을 깊게 탐구하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하는 것이 행복할까요? 궁금함에 대해서 작가님께 너무 궁금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대하는 용기 있고 정갈한 자세가 늘 부럽습니다."
6회, 고백하고 싶어지는 이슬아 작가님께, 2021-02-03
물론 나도 그에게 뭐라 할 입장은 저언혀 되지 않는다. 상대를 생각해야 할 순간에 지밖에 몰랐던 수많은 나의 까르보나라적인 순간을 생각하며. 우리 함께 우리의 세계를 더욱 확장해봅시다. 상대를 궁금해하고 상대에게서 배우려 애씁시다. 슬멘.
"그러니까 저는 궁금해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품은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만이 저의 살길입니다."
7회, 고통을 공부하느라 고통스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202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