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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Sep 26. 2018

네게 해로운 사람

‘내게 무해한 사람’은 왜 나를 울렸나

처음에는 분명히 조금 심심하네, 하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름’을 읽으면서는 지난 봄 연락이 끊겨버린 오랜 친구를 속절없이 생각했으며, ‘모래로 지은 집’을 읽으면서는 주인공이 나와 같은 과오를 저지르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았고, ‘고백’에서 홀린 듯 책장을 넘기다가, ‘아치디에서’의 후반을 동네의 사람 없는 카페에서 읽으면서, 훌쩍훌쩍 울고 말았다. 사람 소중한 줄 모르고 정나미 떨어지게 굴다가, 인연이 끝나는 순간에야 덜컥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마는 주인공들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모래로 지은 집, 162쪽~163쪽
“이제 그곳에 수이와 다시 올 순 없을 거라는 예감”에 젖고, “모래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하는 순간들은 자기기만적인 배신을 품고 있거나 모든 것이 오인에 불과했음을 알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이때부터는 삶이란 곧 회한에 다름 아님을 받아들인 채 한 걸음씩 헤쳐나갈 도리밖에는 없다.

-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 304쪽


내가 관계맺는 방식이 얼마나 방어적이고 동시에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지 알고 있다. 개방적인 척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폐쇄적이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허물없이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도 가까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점점 고민스럽다. 학교 외의 집단에 많이 참여하게 되고,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나는 점점 ‘둥글둥글하다’, ‘무난한 성격이다’라는 평가를 많이 받게 됐다. 하지만 내가 사실 얼마나 모난 사람인지는 나만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말 깊은 관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지금의 내 관계가 속 빈 강정 같다는 것도 안다. 내게도 그런 관계가 있었다. 나와 가장 친했던 사람과는 고등학생 때 만났다. 수아와 이경의 이야기, ‘그 여름’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생각나 내내 마음이 아팠다. 어딘가 가고 싶으면 당연히 그 사람에게 연락할 일이었다. 그 사람과 나는 올해 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있다. 혼자서 그 일을 이해하려 노력한 지 몇 개월, 당연히 그 사람에게 다시 연락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결론은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 거였다. 이대로.


나는 다시는 그만큼 누군가와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쌓을 수 없으리라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과 그렇게 가까워지기까지의 과정 역시 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아주 순수하지도 않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어쨌든 앞으로 내가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기는 아주 어려울 거다.


남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생각한 것뿐임을 안다. 그들에게 자꾸만 거리를 두는 것은 그저 누군가가 그만큼 나를 중요하게 여겨 주리라는 자신이 없는 비겁함일 뿐이다. 나는 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낫다고 생각하는 스물여섯이 되어 버렸다.


사람에게 기대기보다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공무는 애틋함을 불러일으키지만, 온실 속 화초 같은 모래는 자신을 전혀 과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함마저도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라 생각되는 존재다.

-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 310쪽


최은영의 이 소설집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이유는 뭘까. 아무도 나에게 해로운 사람일 수 없도록 도리어 모두에게 차갑고 해로운 사람이 되어버린 나, 그리고 그런 내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서늘한 비극들을 너무나 디테일하게 묘사해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제발 그녀가 나 같은 사람이라서 이런 글을 쓴 것이길 바랐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으며 위안하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글은 그렇게 자주 올리면서 개인 메세지나 전화는 나누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언제든 관계를 끝내고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쿨한 사람인 척 허세를 부리면서도, 정작 조금이라도 마음을 쏟았던 관계가 끝나면 그제서야 덜컥 후회하고 아파하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방어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 놓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는 인간. 스스로 고독의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인간.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베팅하지 않았을 때 남는 외로움만을 감수하기로 한 누구보다 소심한 인간이다.


이것은 인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남에게 매달리는 것에 질색하는 인간.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관계에 감정을 소모하느라 일상이 휘둘리는 것을 ‘자기관리’의 실패로, 남에게 무언가를 바라느라 원망하고 슬퍼하고 안달복달하는 것을 나약하다고 낙인찍는 사람들. 고독하고 슬픈 전사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약하다고 생각해 버린 사람들. 솔직하지 못한 아이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모래로 지은 집, 152쪽
하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내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도우려 하면 불쾌해했다. 왜 모든 일을 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이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와서 그렇다고 말했다.

-아치디에서, 274쪽


유감스럽게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만 있을 뿐이다. 이별의 순간에나마 그것이 중대한 비극임을 깨닫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형태로 나의 외로움은 표출된다. 나는 왜 혼자 책을 읽다가도 불쑥 이 순간을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고 싶을까. 그걸 이야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어디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남아 쿨병 걸린 유해한 이 존재들을 괴롭힌다.


아무도 좋아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마음을 굳힌다고 해도 소용없어. (중략) 아무도 좋아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눈을 보면, 그리도 목소리를 들으면...... 소용이 없어져서.

-아치디에서,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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