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리 Jan 17. 2019

원펀맨, 취미의 진정한 의미

왜 그는 '취미'로 히어로를 한다고 말하게 되었나

취미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글 같은 건 회사를 다니면서 취미로 해도 되잖아'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 때는 그 말에 왜 그렇게 배알이 꼬이는지 알지 못했다. 취미란 진지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거다.


여전히 취미라는 말을 들으면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든다. 나를 자기만의 세계가 단단하게 있는 사람으로 완성해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회사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주제에 악세서리 줄줄 달듯 취미를 늘어놓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런 나는, 최근 원펀맨을 보게 됐다.


취미로 히어로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대사는 진지한 세계에 끼어든 B급 개그 정도로 취급받는 모양이지만, 나는 이 대사가 예사롭지 않았다. '취미'에 대해 이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해석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사이타마는 작중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제대로 히어로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수련했고, 악인이 나타나면 달려가 무찔러 사람들을 구한다. 누가 공으로 기록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몰라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 그 행위를 '취미'라 부르는 이유는, 돈을 대가로 받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히어로협회에 등록되어 수당을 받게 되는 후부터는 '프로' 히어로라고 말한다.)


“모든 진지한 활동을 단순히 생계를 위한 활동의 지위로 평준화하는 추세는 오늘날 노동이론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이론들은 거의 똑같이 노동을 유희의 반대로 정의한다. 그 결과, 모든 진지한 활동은 그것의 결과에 상관없이 노동으로 불리며, 개인의 삶이나 사회의 삶의 과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 모든 활동은 유희로 전락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184쪽)


“노동의 해방은 노동활동을 활동적 삶의 다른 활동들과 동등한 것으로 만든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 활동을 거의 경쟁할 수 없는 지배적 활동이 되게 하였다. ‘생계유지’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과 무관한 모든 활동은 하나의 ‘취미’가 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185쪽)


우리는 돈을 받고 하는 행위만이 '프로', '전문',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과 직업을 그토록 일치시키고 싶어 하고, 그게 아니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갈망한다.


나는 아직도 몇 년 전 대학 수업에서 들었던 한 철학 교수의 말을 잊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도 취업하지 못하는 사람은, 조급해하고 망가질 수밖에 없다. 자기 정체성을 어떤 '직업'에 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40이 넘어서도 대학 교수가 되지 못했지만, 나는 내 정체성을 '학자'에 두었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20대 초반,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직업명이 아닌 행위로 소개했다. '가수'가 아니라 '노래하는 ○○○,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옷을 하는 □□□'. 신분보다 행위가 내 정체성을 정확하게 말해준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콱 박힌 건 그들을 보면서였다.


정체성은 신분이 아닌 행위에서 나온다.


사이타마라는 캐릭터에서 중요한 것은 히어로 타이틀보다 히어로 행위를 중요시한다는 거다. '취미로 히어로를 하는'이라는 대사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대가를 주지 않아도 계속하는 행동, 우리는 아직 그런 걸 취미라는 이름으로밖에 부르지 못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게 해로운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