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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an 27. 2019

우리는 왜 묵자(墨字)를 몰랐을까

디디의 우산, 황정은의 변화

1.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그만두자'로


내게 황정은은 누구보다도 절망했으면서도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작가다. 너저분한 살림살이에 냄새가 배어 있는 초라한 세계,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폭력적이고 공허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을 읽는 일은 항상 쉽지 않다. 사람 많은 카페에서 읽으면서도 중간 중간 페이지를 덮고 생각에 잠기게 되고, 나의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하면서, 우리가 사는 곳은 이렇단 말이지, 망할 거야, 근데 뭐, 하고 태연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 이 모양이라고 비관하지 않고 이 모양이지만 잘 살아보자고 갑자기 낙관하지도 않는 그 차분함이 좋다. 마냥 초월한 사람처럼 굴지 않고 좆같은 것을 좆같아, 씨발 하고 비속어를 아끼지 않는 것도 좋다. 『계속해보겠습니다』(2014) 이후 황정은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어 온 건 그 때문이다. 허무가 깊게 깔려 있지만, 차갑다기보다는 미지근한 느낌이었다.


잠을 자고 먹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 돌아오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하고 다육식물이 담긴 작은 화분을 모으고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사고 싶은 외투와 d가 작업장에서 신을 부츠의 방수에 관해 말하고 d를 만지고 늦잠을 자고 고지서를 걱정하거나 이따금 불면하기도 하며 크게 바라거나 크게 비관하는 일 없이 그 집에 잘 적응해 살았다.

「d」,『디디의 우산』, 20-21쪽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계속해보겠습니다』, 45쪽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계속해보겠습니다』, 222쪽


그래서 황정은의 최근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2019)의 어조는 다소 생소했다. 황정은이 현실 세계의 레퍼런스를 이렇게 많이, 대놓고 끌어다 쓴 걸 보는 것도 처음. 실제 사건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많이 서술한 걸 본 것도 처음.


이제 소설 속 화자는 남루한 현실 얘기를 줄줄 늘어놓다 한숨 쉬며,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만두자'고 말한다. 전자가 응어리를 꾹 삼켜 넘기고 억양 없이 중얼거리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화를 토해내다 약간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내뱉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변화는 무엇인가.


2. 혁명을 거친 사람들



왜 하필 이 작품은 『디디의 우산』이라는 제목의 책에 「d」와 엮여 있는가. 디디와 도도가 등장하지도 않는 주제에. 디디와 도도의 이야기가 혁명의 이야기가 돼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이 오기 전, 다소 동화 같은 곳(「디디의 우산」, 「웃는 남자」)에 있다가 조금 덜 동화 같고 더 현실적인 세계(「d」)로 온 황정은의 인물들은, 이제는 실재하는 신문기사와 사건과 책들을 마구 끌어와 구축한 세계(「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필요할 만한 상황이 된 걸까.


디디와 도도의 세계는 『파씨의 입문』(2012)에 수록된「디디의 우산」(2010)에서 시작된다. 디디와 도도가 함께 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후 『아무도 아닌』(2016)에 수록된 단편「웃는 남자」에서 도도는 집 안에 홀로 틀어박혀 디디의 죽음을 곱씹는 무명의 남자로 등장한다. 제목은 웃는 남자지만 도도는 웃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d」(2016)에서 도도는 d라는 하찮은 이름을 얻는다. 집 밖으로 나와 세상에 부대끼게 된다.


그들의 세계가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는 작가 본인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2014년 세월호 이후 소설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이전에 썼던 세계 하나를 깨야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Axt 2017년 9/10월호) 혁명이라는 말을 입에 담던 디디는 벌이라도 받듯 바로 그 다음 순간 죽고 만다.(「웃는 남자」) 도도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디디를 붙잡지 못했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붙잡는 자신의 습성, '패턴'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상투성을 납득해 보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던 도도는 집 안이나 집 밖이나 모두 하찮을 뿐임을 알고는 집 밖으로 나오게 된다. 도도가 아닌 하찮은 d가 되어.(「d」)


정말 역설적이게도, 그 '좆같은 돈' 때문에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생활이 d의 삶을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매일 택배 상하차 노동을 버티며 근육이 붙고 표정이 살아나는 d를 여소녀가 지켜보는 장면은 「d」에서 드물게 따스한 장면이다. 세계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세계로 나와야 살아나갈 수 있다. 흘러야 하고 마주쳐야 한다.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d」를 막 읽었을 때 묘한 감동이 있었다. 온기조차 받아들이기 버거웠던 남자가 열기에 매혹되는 이야기. 모든 것이 혐오스러워졌대도 여전히 우습게 보면 안 될 정도로 뜨거운 뭔가, 손을 대보고 싶은 뭔가. 그런 것이 여전히 있다고 말하는 듯한 소설이었다. 실제 촛불집회의 초입에 완성된 「d」를 읽으며 독자는 '뜨거운 뭔가'에 혁명을 겹쳐보게 된다. 도도는 디디를 잃었지만 디디가 말했던 혁명,을 마주한다. 도도와 디디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혁명이 '완성'된 날 아침,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하는 김소영의 이야기. 그는 악의 상투성(툴)과 탈출하지 못하는 환멸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 세계는 '모두에게 우산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따뜻한 디디의 세계와는 좀 다르다.


'아무것도'와 '아무도'의 '아무'는 '모두'의 부정형이다. 그러니까 디디와 김소영의 세계는 뭔가를 말할 때 주어부터 다르다. 디디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 '모두에게 우산이 필요하다'라면, 김소영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다.


김소영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주어의 범위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한다. 굳이 뭘 말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죽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걱정해야 하는 것들은 그렇게 다 부정적인 것뿐인 세상. 우산을 준다거나 하는 일을 걱정하는 따뜻한 디디 같은 이가 이미 죽어 없어진 세상. 그게 김소영의 세상이다. 


나는 매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단 한가지 이야기.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151쪽


소설 첫 장면, 김소영의 독백은 마치 황정은의 독백처럼 들린다. 황정은은 디디를 죽인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Axt 2017년 9/10월호) 그러니까 저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라는 문장에는 디디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김소영은 뭔가를 필사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만 말할 수가 없는 발화불능의 상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은, 김소영을 위한 위로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3. 탈출할 외부가 없는 세계


『디디의 우산』을 깊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탈출할 수 없다는 절망이다. 「d」가 그 절망의 탈출구를 발견하고 끝나는 반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그 탈출구가 실은 탈출구가 아니었음을 발견하며 끝나 버리고 만다.


기본적으로 그 불행한 세계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돈이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사지 못하고, 부당한 일터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좁고 남루하고 서로의 세계를 침범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 디디의 우산은 실은 어릴 적 우산도 넉넉하게 사지 못했던 디디의 상처를 나타내는 사물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 정말 문제일까.

응?

이 가운데 어느 문제가 가장 문제라서 돈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뭐랄까 좇같은 답이 나오는 걸까. 나 오늘 종일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뭐 좆?

응.

「디디의 우산」, 『파씨의 입문』, 175쪽


나는 저 회전의 댓가로 먹고산다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목공의 댓가로.

「d」,『디디의 우산』, 14쪽


우리 자매는 우리의 부모를 따라 종종 무기력했고 습관적으로 절망했으며 우리에게 어쨌거나 미래가 닥칠 거라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맞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와는 또 다르게 김소리는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당장의 필요를 메꾸기 위해서였고 거기에 미래에 관한 상상이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고 예전에 김소리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165쪽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5장은 뜬금없이 별과 사막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연히 그곳은 탈출해 나갈 '외부'를 의미한다. 별과 사막은 사실 낭만을 뺀다면 죽음밖에 없는 황량한 세계다. 그럼에도 그 공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 맞이할 육체적 궁핍함이 별로 두렵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내가 그랬으니까.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나는 별과 책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204쪽


지난 여름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 목표는 은하수를 보기 완벽한 조건의 시공간을 찾아가는 것. 나는 아직도 그때 나를 낯선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겁도 없이 떠나게 한 동력이 뭔지 생각한다. 그런 걸 보면 삶의 낙이 생길까 싶었다. 뭐라도 삶의 낙을 찾고 싶은데 자본주의 문명에서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게 어디서 왔는지 생각나서 괴로운 사람에게, 진정 상상할 만한 아름다운 것은 광막한 자연뿐이다.


하지만 책장 너머, 현실 너머의 위안처일 뿐이다. 별 이야기로 시작한 5장은 결국 책 이야기로, 어느 새 아버지 이야기로 변해 있다. 아무리 많은 책들을 인용해도 그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현실 이야기의 주석으로 쓰일 뿐이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d」,『디디의 우산』, 114쪽


불모의 세계를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그 뒤를 이어 쓸 수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어떻게 써도 거짓말, 기만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고, 내가 상상하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없었다. 탈출의 경험이 내게 없기 때문일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196쪽


그동안 황정은의 소설 주인공들에게서 읽을 수 있는 주된 감정은 분노였다.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얘기들을 그리니까.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납득해야 하는 삶을 맞닥뜨리면 암굴 속에 파묻혀 생각을 곱씹거나(「웃는 남자」, 2017), 말끔하게 웃음지으면서 속에는 쌍욕을 묻고 살게 될 뿐이다.(「복경」, 2017)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결국 이곳에서 저항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탈출이 불가능한 세계의 파일럿은 파더/티처/기본값을 죽이러 돌아갈 수밖에 없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292쪽


4. 패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아무도 죽지 않기 위해


무엇에 마찰해야 하는가, 바로 '패턴'에 대해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디디와 도도의 세계에서 제시된 질문을 이어받고 있다. 「웃는 남자」에서 도도는 '왜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이 아니라 소유물을 붙잡는 패턴의 사람인건지'를 고민한다.「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등장하는 주요 개념 중 하나는 바로 그 '패턴'이다. 김소영은 늘 하던 대로, 똑같은 말을 생각없이 내뱉는 패턴이야말로 상투성,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것은 때로 '툴'이기도 하고, '상식' 이기도 하다.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159쪽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219쪽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며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265쪽


몇번이고 반복된 질문에 훈련되고 준비된 표정과 어조.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상투어가 아닐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282쪽


이 문제야말로 황정은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고민해 온 문제다. 황정은은 언제나 언어 때문에 생기는 왜곡을 경계해 왔다. 작가는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말'을 꼽는다.(Axt 2017년 9/10월호) 디디와 도도의 세계에서는, 도도가 암굴 속에서 오랜 시간 고민한 문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부터 줄기차게 언어의 왜곡으로 생기는 폭력을 경계해 온 황정은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이르러 한나 아렌트를 불러오기에 이른다. 생각 없이 듣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평범성, 아니 상투성이라고.


황정은은 그것을 '무능'이라 부른다. 악의도, 비극도, 의사소통의 실패도, 오해도 아니고 그저 무능. 멍청한 게 아니라 무능. 무능은 무지나 무력과는 또 다른 뉘앙스를 품는다. 알지 못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은 안타깝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못 한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에 가깝다. 늘 덤덤했던 그녀의 말투에서 이제 일말의 짜증이 느껴진다고 하면 이것도 오해일까.


생각하지 않는 일은 이제 그만, 이제 제발 제대로 좀 알아먹어라.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묻는다. 충분히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에 비극이 생기는 것 아닌가? 우리가 충분히 오래, 충분히 많이 질문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수많은 상투성으로 서로를 상처입히고 이 세계를 더 야만적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등장하는 생각들은, 황정은의 다른 작품들에 등장했던 오래 묵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취한다.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한다.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242쪽


5. 우리는 왜 묵자를 몰랐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275쪽


질문은 이제 한 걸음 나아간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나는 그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곳곳에서는 그 누구도 상투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섬세하게 지적한다. 


그저 상투성의 피해자처럼 보였던 운동권 대학생들도 누군가에게는 상투성의 가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김소리의 일화(233쪽), 동화의 결말을 폭력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김소영의 무능(231쪽), 김소영은 세월호를 더이상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김소리를 불편하게 여겼지만 실은 김소리야말로 누구보다도 세월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가장 직접적인 공감을 느끼는 존재, '부모'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299쪽), 시위대의 비폭력성에 대한 집착을 불편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상투성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생각에서 나왔음을 깨닫는 장면(309쪽)이 그렇다.


김소영은 단순히 세상의 부조리를 마주하고 분노하는 화자가 아니다. 그 역시 한편으로는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고, 약자가 약자에게 상투성의 폭력을 무심히 휘두르는 세상의 한 고리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설은 주인공 김소영뿐 아니라 지금 이 활자를 읽고 있는 독자 역시 그 고리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지목한다. 바로 묵자(墨字)의 세계를 언급함으로써.


서수경과 나는 사십년을 사는 내내 그 말을 몰랐던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를 둘러싼 기록문자들, 우리가 보는 언어들이 전부 묵자인데 그것을 묵자라고 칭한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273


점자가 아닌 인쇄된 활자를 묵자라고 한다. 멀쩡한 시력을 가져서 묵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점자의 세계를 '몰라도 된다'. 묵자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몰라도 된다. 묵자 얘기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우리다. 너나 나나 이렇게 잘난 척 이런 이야기를 쓰고 읽고 있지만 그래봤자 묵자의 세계에서 '몰라도 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황정은의 신작이 그렇게도 현실 레퍼런스를 많이 끌어와야 했고, 예전 소설들에 비하면 노골적으로 분노하며 '그만하자'고 말해야 했던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소설 속에서만 분노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일상에서 약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어디 먼 곳에 떨어진 별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어디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건 지금 우리가 겪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란 말이다, 하고.


이 소설은 도도가 물었던 '왜 누군가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긴 대답이기도 하다. 패턴 때문에 디디가 죽었으므로, 이것은 김소영이 고민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김소영은 아직 그 결말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단 한 번도 '탈출의 경험'을 지녀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 결말이라고 생각했던 2017년 3월 10일 역시, 그 결말이 아니었다.


소설의 열두 개 장은 김소영이 썼다는 열두 개의 미완의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을 합쳤을 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의 이야기가 됐다. 김소영에 의하면 그 제목은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의 제목이다. 이 도식에 의하면 우리가 방금 읽은 이 소설이 바로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혹시, 누구도 죽지 않는 세계로 가는 첫 걸음은 '패턴'의 문제를 정확히 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여기서 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황정은 특유의 반전을 느낀다. 누구보다 냉소하는 것 같지만 끝까지 희망의 씨앗을 숨겨두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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